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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의 조명Ⅲ] 한반도 분단의 원인에 대한 고찰(考察)
[한국 근대사의 조명Ⅲ] 한반도 분단의 원인에 대한 고찰(考察)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21.05.04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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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어떻게 건설되었을까? 대한민국 건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나라는 미국이다. 따라서 해방 전후 미국이 한반도에 대해 어떤 정책을 가졌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1945년 8월 하순 미 국무성은 태평양전쟁 미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를 통해 중앙 미군사령관 하지에게 명령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민간행정업무가 일본군의 항복이 종료된 후에 현실적이 되며, 그때까지는 민간행정업무는 통합되어야 하고, 그러므로 한국이 하나의 중앙집권화된 행정구역을 만들어야 한다.” 즉, 미국과 소련이 힘을 합하여 일본군을 해산시킨 후 대한민국을 하나의 중앙집권화된 정부로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을 미 국무성에서 보낸 것이다. 38선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만든 미국과 소련 사이에 만든 군사분계선이다. 38선 이북은 소련이 담당하고, 38선 이남은 미국이 담당하기로 한 것이다. 38선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서 임시적으로 만든 분계선이므로 일본을 해산시킨 후 하나의 통일된 정책과 정부를 수립하려는 정책을 미 국무성에서 확정한 것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전쟁이 끝난 후 민족자결주의와 신탁통치의 과정을 거쳐서 보통선거를 통한 민주공화국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모르는 한국인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쳐줄 수 있는 기간이 필요하였다. 이 기간이 바로 신탁통치 기간이다. 이 기간을 통해 민주주의와 세계무역을 알게 되면 저절로 이후 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드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소련은 미국의 이념과 정치 체제가 전혀 다른 인민혁명을 통하여 인민공화국을 건설하려고 하였다.
미국은 38선으로 인한 한반도가 분단되게 된다면, 이 문제에 대한 책임과 비난이 미국에게 지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반도의 민정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연락관을 파송하는 등 많은 노력에도 소련의 거듭되는 거절로 인해 과연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하나의 정부를 만들 수 있을까? 라는 큰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때마침 미국이 원자탄 실험에 성공하였다. 그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과 회의하는 중에 원자탄 실험이 성공하였다는 비밀전보가 전해지자 미국은 더 이상 소련의 도움이 아닌 단독전쟁과 미국의 단독점령으로 전략을 선회하였다.
미국은 소련이 8월 말경 일본에 상륙하여 전쟁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소련이 개입하기 전, 즉 8월 초 일본을 이겨버리면 소련의 몫은 없어지고 미국이 한반도를 장악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였다. 미국의 원자탄 투하는 소련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였다. 미국의 원자탄 투하로 전쟁이 끝나버리면 소련은 자신의 계획했던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1차 원자탄을 투하했음에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자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소련은 같은 날(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하며 만주를 침공하였다. 미국과 소련이 함께 일본을 향해 공격하자 일본은 8월 10일 항복을 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었다. 소련은 태평양전쟁에 9일, 단 하루 전쟁에 참여하였으나 하루라도 전쟁에 참여했으니 자신의 몫을 달라고 미국에 요청하였다. 미 국무성 고위 관료들은 소련군이 한반도의 어디까지 와도 되는지 의논하였다.
당시 소련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어 연변에 있는 관동군(關東軍)과 싸우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군이 38선까지 내려와도 괜찮다고 통보를 해주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군은 오키나와에 있었고 한반도까지 배로 도착하려면 약 한 달이 소요되었다. 소련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기 때문에 열흘이면 부산까지 내려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 시킬 것을 염려하여 38선까지 내려올 수 있도록 제안하였다. 38선까지 내려온 소련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킨 후 38선을 경계로 삼아 교통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남북의 교류를 단절시킴으로써 군사분계선에 불가했던 38선이 정치적 경계선으로 변함으로써 한반도가 둘로 나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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