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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小鹿島)에 대한 이야기
소록도(小鹿島)에 대한 이야기
  • 강영철
  • 승인 2019.02.21 2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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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운 20대 처녀가 수천명의 환자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며 어느 새 일흔의 할머니가 돼버린 것입니다.
두 수녀님은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나환자들의 곪은 상처를 만저 주고 꼼꼼이 약을 발라줬습니다.
김호진장로(생명샘교회)

고흥반도의 서남쪽 끝 녹동항 앞바다, 이 앞에 작은섬 소록도 어린사슴모양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여행객들에게는 아름다운 섬이지만 한센인들에게는 유배지이자 감옥이 였다. 살아서는 나갈 수 없는 땅이 였기 때문이다. 나병, 문둥병, 천형병 (天刑病) 이라고 불렸고,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로도병원이 들어서 있는 섬으로 더 유명해 졌다.

소록도는 서기 1916년 5월에 일본 사람들이 나병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강제로 원주민을 이주 시키고 이 섬에 자혜원이란 이름으로 나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그리고 조선에서 감연된 나병환자들을 강제로 수용하여 자헤원 원장(일본사람)이 앞장서서 환자들을 강제 노역 등 폭력을 일 삼으며 학대함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을 주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며 운영해 나갔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수용인원이 600여명이 였으나 점점 늘어나서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가 행방이 될 무렵에는 7.000먕 기까이 수용인원이 되었다고 하며 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가 해방이 되자 소록도 자혜원에서 소록도 갱생원으로 그리고 1960년부터는 국립소록도병원으로 개편하여 수용위주에서 치료위주로 관리 정책으러 전환하였다고 한다.
일제시대 여러 원장이 거의 악질적으로 운영을 하였지만

그 중에 한분 1921년~1929년 9년동안 제직한 “하나이 (花井善吉)” 원장은 인간 본연의 모습인 사람이 였다

그는 환자들을 자기 가족처럼 아껴주고 보살피고 참으로 헌신작으로 차별없이 동등하게 골고루 잘 베풀면서 운영해 왔으며 마지막까지 헌신하다가 소록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소록도의 살고 있는 모든 환자들은 그를 향해 소록도의 슈바이쳐라고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기리기 위하여 환자들이 모금하여 공덕비를 세워기 까지 하였다 (소록도 중앙공원에 세워져 있음 )

오늘은 소록도에 있는 성당 한 곳과 7개의 교회가 있다 우선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은 두 분의 수녀님들의 대한 헌신적인 봉사와 희생적인 사랑의 극치인 아름다운 두 분의 안내판이 눈에 뜨인다

“마리안느 & 마가렛 수녀님” 바로 소록도 개원 50주년 기념비 옆에

사진 4장과 함께 설명문이 새겨져 있다.
넉 장의 사진 중에는 중앙공원의 공적비도 있다. 두 장의 사진은 수녀님의 사진이고 한 장은 두 수녀님들이 살았던 관사 사진이다
그날 하늘에는 낮게 먹 구름이 잔득 끼어서 날씨는 우중충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는 아직 내리지 아니하였고 거센 바람만이 남쪽 바다를 일렁이게 하였습니다 2007년 6월14일 초여름 이른 아침이였습니다.

소록도 한센인교회
소록도 한센인교회

작은 통통배에 서서 두 수녀님은 하염없이 소록도를 뒤돌아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것잡을 수 없이 작고 예쁜 노란 소수건으로 연신 눈시울을 훔치고 있었습 니다. 20대 꽃다운 처녀 시절부터 40년을 넘게 살았으니 소록도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였습니다. 배는 10여분 만에 육지에 닿았습니다. 소록도와 녹동 항은 지척거리에 있습니다. 두 수녀님은 아침 일찍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두 수녀님은 나이 들어 거둥이 불편 해서 더 이상 돌볼 수 없게 되자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정확히 48년과 45년 만에 귀국하게 된 것입니다

마리안느 (71세) 수녀님은 1959년에 그리고 마가렛트 (70세) 수녀님은 1962년에 소록도에 각기 첫 발을 내디었습니다. 그 무렵 오스트리아의 고향에서 간호학교를 나온 두 수녀님은 수녀회를 통하여 소록도 병원에 나환자들을 돌봐줄 간호자가 없다는 딱한 소식을 듣고 자원해서 머나먼 이국땅을 밟은 것입니다.
두 수녀님은 처음 소록도에 왔을 무렵에는 문등병 환지 6.000여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은 창살 없는 감옥인 소록도에 강제로 같혀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 소록도 병원은 가난한 국가 형편 때문에 재정적 지원이 빈약하여 치료약도 제대로 없었고 나환자들을 돌봐줄 의료진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 였는데 강제로 수용된 환자들을 동원하여 공사판에 투입시켜 일을 시키는 바람에 매일매일 고된 노동일에 시달려야 했고, 나환자들이 결혼하기 위해서는 먼저 강제로 단종수술을 받아야 했으며 어쩌다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섬 밖으로 안 쫒겨나기 위해서는 강제로 낙태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두 수녀님은 처음 소록도에 당도했을 때에는 평생을 지내리라고는 미쳐 생각지 못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해주고 돌봐주려면서 평생 이 곳에서 살아야 겠구나 하고 이내 결심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해야 할 일은 지천이 였고 돌봐야할 사람은 끝이 없었습니다.
두 수녀님은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들을 직접 돌보기 시작한 것이 이제 40년이 넘었습니다.
꽃다운 20대 처녀가 수천명의 환자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며 어느 새 일흔의 할머니가 돼버린 것입니다.
두 수녀님은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나환자들의 곪은 상처를 만저 주고 꼼꼼이 약을 발라줬습니다.

그 무렵 한국 간호사들은 환자들을 혐오하고 무서워해서 위생복을 입고 위생 장갑에 마스크까지 끼고 환자들에게 약을 줄 때에는 핀셋을 사용 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본국수녀회가 매달 붙여오는 생활비까지 쪼개 환자들의 우유와 간식비로 쓰기도 하고, 져녁에는 죽도 쓰고 과자도 구워 아무도 거둘떠 보지 않은 섬 안에 있는 일곱게 문둥이 부락을 일일이돌았고, 한센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영아원을 운영 하면서 이들의 교육과 자활정착사업에도 헌신 했습니다

글/사진 김호진 장로(생명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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