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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해석 제516신 (여호수아 제30신)
할렐루야! 해석 제516신 (여호수아 제30신)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19.12.10 23: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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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목사
동천교회 담임
신동욱목사
신동욱목사

할렐루야! 사랑하는 일열낭독운동회원 여러분!

지난 한 주간(週間) 동안에도 주님의 은총(恩寵) 가운데 평안(平安)하신지요?

신동욱 목사입니다.

오늘이 12월9일(월)입니다.

그저께(12월7일-토)가 대설(大雪)이었고 22일이 동지(冬至)입니다.

25일은 성탄절(聖誕節)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후(主後) 2019년의 마지막 달(月)도 지나갑니다.

세월(歲月)이란, 소리도 없고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고 일절(一切) 자취가 없습니다마는, 그러나 아주 자취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변하는 나를 포함한 사람의 외모(外貌)를 보고 그 외(外)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보면서 우리는 세월이 쉬지 아니 하고 흐르고 있음을 절감(切感)합니다.

옛 시인(詩人)의 시(詩)에,

『오백년(五百年)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없네』 라고 노래한 시(詩)도 세월의 무상(無常)함을 노래한 시입니다.

산천이라고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인간하고 비교(比較)해서 그 변화(變化)가 아주 천천히 오랜 세월에 걸쳐서 변하기 때문에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을 것입니다.

중국 청(淸)나라 때의 시인인 이방응(李方膺)이 무상한 세월에 관해서 인상적으로 노래한 시 한 수(首)를 소개합니다. 『제묵송도(題墨松圖)』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역자(譯者)의 번역(飜譯)에 의하면, 『소나무 그림에 부쳐』 라고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수많은 세월

뿌리 뻗고 가지 무성(茂盛) 찬 기운(氣運)이 서렸네

이를 남긴 하늘의 뜻 알 수 없거니와

범(虎) 발톱, 용(龍) 비늘, 늙어 갈수록 더욱 단단하구나』

이방응은 성품(性品)이 강직(剛直)하여 벼슬하는 동안 자주 윗사람의 비위(脾胃)를 거슬려 끝내는 파직(罷職)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는 그가 스스로의 처지(處地)를 소나무에 견주어 그려내고 그 그림에 부친 것입니다.

저도 아침에 산(山)기도 올라가다 보면, 등산로(登山路) 옆의 소나무를 봅니다.

어떤 소나무는 과연 뿌리를 땅 표면 밖으로 드러내어 그야말로 그 완강(頑剛)함이 범 발톱 같습니다. 또 정상부근의 낙낙장송을 보면, 오래된 껍질이 아닌게아니라 용 비늘 같아 보입니다.

오랜 세월 강퍅한 환경에 뿌리를 내리고 온갖 풍상(風霜)을 견디어 낸 낙낙장송이 이와 같습니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우리네 인생도 이와 같지 아니한가 생각해 봅니다.

이제 해석 제 516신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오늘도 해석 제514신에 이어서 현금(現今), 우리나라와 우리국민이 처(處)한 상황(狀況)에 관하여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자유(自由)가 아니면 죽음(死)을 달라!!」

인류 역사의 천둥소리가 된 이 한마디는 주후 1775년 3월23일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세인트존 교회에서 영국의 식민정부에 대항(對抗)해 민병대(民兵隊)를 조직(組織)하기 위하여 모인 버지니아 「식민지협의회(植民地協議會)」에서 행한 패트릭·헨리의 연설(演說) 중 마지막 한마디였습니다.

그 연설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 의장(議長)님, 사태를 완화(緩和)시키려는 것은 이제 헛된 일입니다. 여러분은 평화, 평화를 거듭 외치고 있지만, 평화는 없습니다. 전쟁(戰爭)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다음에 북쪽에서 불어 올 강풍(强風)은 우리의 귀에 무기(武器)가 맞부딪히는 소리를 들려줄 것입니다. 우리의 형제들은 이미 전장(戰場)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여기에서 한가(閑暇)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발목과 손목에 쇠사슬을 차고 노예(奴隸)가 되어가고 있는데도 목숨이 그리도 소중하고 평화(平和)가 그리도 달콤하단 말입니까?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이시여! 저희의 길을 인도해 주옵소서. 여러분들이 어떤 길을 선택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외칩니다. 「내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지난 해석 제514신에서 역사상 인류가 지향(指向)해 온 뚜렷한 길은 「자유」라고 말씀을 드린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향한 위대한 첫 걸음이 1215년 영국의 마그나카르타(인권대헌장-人權大憲章)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자유를 향한 거보(巨步)인 마그나카르타와 더불어 그로부터 560년 후(後)에 행해진 미국의 독립운동가 패트릭·헨리의 연설 대미(大尾)를 장식한 이 한마디는 인류의 자유를 향한 대행진에 마침표를 찍는 것과 같은 한마디였습니다.

오늘의 위대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바로 영국의 장로교인들인 청교도(淸敎徒)들입니다.

패트릭·헨리는 청교도의 후예(後裔)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救援)의 길로 인간과 인류를 인도함과 아울러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위대한 자유선언(宣言)을 한 유엔헌장(憲章)이 있게 한 단초(端初)요, 뿌리가 바로 기독교(基督敎) 신앙(信仰)입니다.

지난 514신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 영혼(靈魂)이 죄(罪)로부터 해방(解放) 받는 근본적인 영적자유와 아울러 육체적인 자유까지도 선언(宣言)한 이 위대한 자유선언은 기독교 경전(經典)인 성경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기독교의 신앙운동인 종교개혁(宗敎改革)과 청교도운동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와 공산주의(共産主義)와의 싸움은,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이요, 자유(自由)와 억압(抑壓)의 싸움입니다.

이에 관해 갈5:1절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고 명령(命令)하시고 계십니다.

물론 근본적으로 죄(罪)로부터의 자유인 영혼의 자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육체적(肉體的)인 자유도 주셨습니다.

또한 요8:31~32절 말씀은,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居)하면 참 내 제자(弟子)가 되고 진리(眞理)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自由)케하리라” 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일열낭독운동회원 여러분!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근본적(根本的)인 자유인 영혼(靈魂)의 자유와 이 땅에서 우리가 육신(肉身)을 입고 사는 동안에 육신의 자유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억압(抑壓)으로 말미암아 무릎을 꿇고 사느니 의연히 서서 죽는 자유를 택(擇)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恩惠)요, 신앙(信仰)의 명령(命令)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할렐루야! 주후 2019년 12월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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