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6:10 (토)
상정사회(相情社會)를 생각한다
상정사회(相情社會)를 생각한다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24.02.01 09: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자신의 내면에 자신으로 가득 채우면 나 외의 다른 존재가 들어올 여지가 없다. 그래서 서로 상정(相情)하려면 마음이 빈공간이 되어야 한다. 자기로 꽉 찬 내면에는 자기를 자기 홀로 독차지하고 있다. 결국 스스로 홀로의 섬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을 때 들어간다. 엘리베이터가 문이 열린다. 사람들이 꽉 차서 들어설 틈이 없으면, 자기 앞에 문이 열려도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는다. 결국은 포기하고 만다. 다원주의(多元主義, pluralism)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흥미, 관심, 문화 신념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상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보편화되었다. 다른 존재를 나와 동등하게 인정하고, 다른 존재의 의견이나 뜻은 틀리고, 나만 맞다는 배타주의뿐 아니라 다른 존재들을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포괄주의나 우월주의와도 반대되는 개념이다. 다원주의는 말 그대로 나와 다른 존재 자체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의 덕목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이 자리 잡게 된 기초사상이다.

정치 다원주의, 종교 다원주의, 문화 다원주의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와의 보편적 상식이 되었다. 누구든지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생각이 뿌리박혀지며 자존감이란 미명아래 자기만의 혼자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절대 정의(正義)라고 확신한다. 여기서 파생되는 독소가 있다. 자기 자신만 유아독존이고 타인도 누구나 유아독존적 존재임을 인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용납지 아니한다. 역설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가 하는 욕망은 하늘을 찌른다. 홀로 있을 때는 홀로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만족할 수 있으나 타인과 더불어 사는 세계에서는 타자의 시선과 관심, 그리고 존경함을 받고자 한다면 다중 중에 자신도 하나임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욕망 중에 가장 큰 욕망은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모든 기존의 틀을 깨고, 포스트 모던한 존재로 자기를 포현하여도 아무에게도 관심을 끌지 못하고, 무시당할 때에도 그는 당당해야 한다. 그래야 개인주의 사회에서 공존 공생할 수 있다. 자기 자신만 위하는 개인주의자는 집단에서 단절되고, 단절된 개인은 사회적 생명을 잃은 것이다. 단절로 오는 자기 자신의 고독과 공허감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가끔은 일탈을 낳기도 한다. 다원주의는 인간을 비도덕적 존재로 만들기 쉽다. 내가 법이고, 내가 국가이고, 내가 나의 주인이며, 내가 나를 다스리는 왕이다. 윤리란, 인간과 인간관계 질서이다. 나와 너가 단절된 상황에서 윤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 왕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겐 사회적 책임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생산이 감소하고 있다. 타인을 위한 희생, 배려, 양보, 타자를 위한 자기 부정 등은 보수 윤리라고 치부한다.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본다. 지금 한국은 지성인도, 종교인도, 정치인도, 기업인도, 예술, 문화인들도 모두 자기 안에 자기애(自己愛)로 꽉 찬 사회가 되었다. 그들에겐 이웃은 없다. 부모들이 자기 유익을 위해 의사를 만들기 위해 유치원부터 교육한다. 이렇게 자란 인간에게 인술(仁術)을 요구할 수 있을까? 환자가 자기 수입원이 되고, 사람의 몸을 물리적이고, 화학적으로만 보는 의사가 어찌 인간을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그의 뇌리에는 자신이 투자한 자원에 대한 보상 이윤 외에 또 다른 생각을 할까? 어릴 적부터 부모가 ‘너는 돈 많이 벌려면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인식시켜 양육하면 이윤 논리 외에 또 무엇을 생각할까? 돌봄교실을 운영하자고 하자 교사들이 피켓을 들고 돌봄은 교육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교사, 학생은 전혀 없고 냉엄한 자기 노동에 대한 대가만 따지는 그들이 학생들을 교육할 수 있을까? 국민의 세금으로 세비를 받고 회의엔 회의비까지 따로 받는 국회의원이 회의 중에 거액의 코인을 사고팔고 있는 그가 애국이 어디 있고, 국민이 안중에 있을까? 오직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뒤늦게 40이 넘어 아기를 생산하면 그 아기가 정상아가 될 수 있을까? 만혼으로 인한 이상이 있는 신생아의 분만이 20%를 넘고 있다. 스스로 비극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종교도 종교를 위한 종교가 되고 있다. 왜 종교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종교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종교이기 때문이다. 국회의 법 제정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다. 다시 국회의원이 되고자 표 모으기 위한 법만 제정한다. 근로자는 인간이다. 인간은 실수가 있다. 완전하지 못하다. 산업 현장에서 일어나는 노동자 실수를 무시하고, 고용한 기업인에게만 책임을 돌리게 하는 것은 선거전 득표 전술이다. 노동자의 표가 기업인들의 표보다 많다는 것을 계산하고, 묵묵히 밀고 나가는 것이다. 한국을 구성한 국민들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자기 자신을 위하고, 그 시대 가치를 획득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만 전쟁 중이 아니다. 한국은 전 국민이 서로 각개전투를 하고 있다. 이젠 가정도, 피붙이도 없다.

유교의 악습인 계급 위주의 가치는 이어받으며, 생명공동체인 가정, 가족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과연 사상적 발전이 인간에게 행복을 주고 있는가? 한국적 심성인 정(情)은 사라지고, 차가운 얼음장 같은 사회가 되고 말았다. 나의 내면에 이웃을 맞아들일 수 있는 더불어 정(情)을 나눌 줄 아는 상정사회(相情社會)로 다시 바뀌어 나가야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베개 베고 누워서도 만족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설날이 무심함도 이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