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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포격전 참전장병 증언 '그날의 기억'
연평도 포격전 참전장병 증언 '그날의 기억'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24.01.0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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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1월이 되면 가슴이 아픕니다.' 30대 해병대사령관 유낙준
'매년 11월이 되면 가슴이 아픕니다.'  30대 해병대사령관 유낙준
'매년 11월이 되면 가슴이 아픕니다.' 30대 해병대사령관 유낙준

2010년 11월 23일 14시 34분경 북한군이 연평도에 170여 발의 기습 포격 도발을 자행하자, 우리 해병대 연평부대는 K-9 자주포로 신속하게 대응 사격을 시행하였다. 연평도 포격전은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 거주지역에도 무차별 포격을 가한 북한의 불법적이고 비인도적인 만행으로, 해병대원 2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2명이 사망하였으며 다수 인원이 중경상을 입었다.

포격전 결과 북한군은 우리 군의 대응 사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회 원유철 국방위원장은 "한미 연합 정보자산 등을 통해 북한 피해상황을 분석한 결과 두 자릿수 이상의 사상자가 난 것으로 파악했고, 우리 군이 막사를 집중적으로 포격한 무도 지역에 사상자가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고 를 받았다."라고 언급했다. 

우리 연평부대는 해병대원 2명이 전사하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또한 건물 133동(전파 33, 반파 9, 일부 파손 91)과 전기 및 통신시설이 파손되었으며, 10여 군데에서 산불이 발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K-9 자주포로 신속하게 대응사격하여 북한군의 추가 도발의지를 꺾고 연평도를 지켜냈다.

Q. 연평도 포격전 당시 소속 및 직책과 계급은?

A. 연평도 포격전 당시 30대 해병대사령관이었으며, 취임한 지 약 4개월 정도 되었을 때 연평도 포격전이 발생했습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우리 서정우 하사, 문광욱 일병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빕니다. 아직까지도 포격전 당시 부상당했던 전우들 16명의 명예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하루빨리 명예 회복이 되도록 기원하고 힘을 모으도록 하겠습니다.

Q. 포격전 발생 당시의 상황은?

A.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전 발생 시 저는 포항에 있었습니다. 당시 합동상륙훈련 중이었던 1사단을 거쳐 교육훈련단에 작전지도차 방문했을 때 포격전이 발생했다는 것을 유선으로 보고받았습니다.

당시 연평부대에서는 매월 계획대로 해상사격훈련이 실시되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포격전 당일에 실시한 사격훈련이었습니다. 훈련 시에는 해상 통제를 위하여 합참 및 전군에 보고가 되었고, 그러한 상황하에 연평부대는 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대비태세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북한이 실제 도발을 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Q. 포격전 발생 상황보고를 받고 느꼈던 심정은?

A. 당시 해병대사령부 정보처장과 연평부대장으로부터 포격전 발생 사실을 유선으로 보고받고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사실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집에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아플 때 그런 생각 하잖아요,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어려움을 주나. 아마 연평부대장도 마찬가지였겠죠, 포7중대장 김정수도 마찬가지였겠고.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이 아니길 바랬습니다.

그렇지만 곧바로 사격준비를 승인했어요. 사격준비를 해라. 그때부터 한 2~3분 동안,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6 · 25전쟁 때 한강대교를 폭파한 육군 공병감 최창식대령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자의가 아니라 육군 참모총장의 지시로 한강대교를 폭파한 것이었음에도 그분은 사형을 당했어요. '나도 사격을 하면 사형을 당할 수도 있겠구나, 또 사격을 안 해도 직무유기로 사형을 당할 수도 있고..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다음으로는 가족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식구들은 앞으로 어디 가서 무엇을 하면서 살까? 내가 사형을 당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한 생각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니까, 그제야 나라 생각이 났습니다. '혹시 제2의 6 · 25전쟁이 발발하는 것은 아닐까?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는 건 아닐까?' 이러한 고민들을 했습니다.

사실 이 얘기는 제가 강연이나 신문사 인터뷰 시 여러 번 했었지만 번번이 편집되었죠. 어떤 사람들은 "왜 장군이 되어서 그런 얘기를 하냐, 마음속에 있어도 하면 안 된다.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우리 지역에 있는 젊은 목사님과 자리를 같이할 일이 생겨서 이 얘기를 했더니 그분이 그러더라고. "그런 얘기를 꼭 하셔야 합니다. 전쟁에서 인간적인 측면이 제외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얘기를 할까 말까 하다가 했는데, 사실은 많은 고민을 했어요.

Q. 최초 대응사격 명령을 내리던 상황은?

A. 교육훈련단에서 보고를 받은 뒤 즉시 지휘통제실로 내려가서 화상 화면을 켰는데, 그때 지휘통제실에는 교육훈련단 참모들도 함께 앉아있었습니다. 하... 그때 정말로 그 참모들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쏠까? 말까?' 그런데 그때 그 누구와도 눈이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만약 한 명이라도 눈이 마주쳤다면 "어떻게 할까?"라고 물어봤을 겁니다.

사실 참모들도 그 순간에는 저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겠죠. 그래서 '아, 내가 혼자 스스로 결정을 해야겠다. 만약 내가 참모들의 조언대로 결정한다고 해도, 그 참모들은 평생 얼마나 많은 부담을 가지고 살아가겠나. 이 중에서 내가 나이도 가장 많고, 계급도 제일 높고, 경험도 많으니 내가 결정하는 게 맞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마침 연평부대장 이승도 대령에게서 사격준비를 완료했다는 전화를 받았고, 곧바로 "쏴!"라고 외마디 명령을 내렸습니다. 저는 평상시 목소리로 명령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우리 정훈장교가 "왜 그렇게 고함을 질렀습니까?"라고 묻더라고요. 아마 두려움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두려움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당시 정전 시 교전규칙상 서북도서의 K-9은 해병대사령관에게 사격지휘 권한이 위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격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었는데, 사실 사격을 결정할 당시 화상으로 청와대, 국방부, 합참, 각 사령부에서 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6·25전쟁 이후 우리 군에는 전쟁을 경험한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감히 쏴라 마라, 얼마를 쏘라고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겁니다. 상급 부대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견을 제시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그런 것을 물어볼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그래서 결국은 1차 대응사격 당시에는 해병대사령부의 결정으로 사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대응사격을 할 때는 화상으로 토론하고 그러던데, 사실은 그때도 아무도 명령하거나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고, 적의 포탄이 날아오는 동시에 우리도 같이 사격하게 되었죠.

한편 유낙준 30대 해병대사령관은 안보가 먼저냐, 경제가 먼저냐?' 질문에 안보에 우선순위를 매기기보다는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호흡하듯 국민들에게도 안보의식이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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