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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말씀잔치를 시작하면서 19장
요한계시록말씀잔치를 시작하면서 19장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23.11.25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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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19:11-16 본문은 드디어 주님의 재림의 모습이 등장한다. 12:1~사단의 패배(하늘의 자리 빼앗김, 그리스도 구속과 성도를 변호하심은 성도를 구원하시고 속죄하심을 이룬다)사단의 땅으로 내려와 더 큰 분 냄으로 또한 힘을 내어 싸우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 등장하는 것이다. 13:1~사단의 대행자(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13:7~ 땅에서 올라온 짐승) 17:1~ 바벨론 심판, 20:7 ~ 마지막 사단의 심판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사단의 패배의 시간적, 순서적 사건으로 배열이 아니며 시간적으로 표현하면 하나의 사건을 여러 가지 관점 (두 짐승, 대행자 음녀, 바벨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멸망은 역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18:1~ 바벨론의 멸망 19:19~ 두 짐승의 심판과 멸망  20:7 ~ 마지막 사단의 심판과 멸망을 기록하고 있다.
강영철목사
강영철목사

계19:1-5 할렐루야 4번 등장 (본문3회. 6절)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성도들의 찬송이며 바벨론의 심판 받은 것이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하신 내용을 신실히 이루셨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력을 심판 할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내용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 전체가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의미에서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는 말씀이 등장하는 것이다. 구원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총체적인 계획의 완성이라는 의미로 즉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의 이루어짐이 우리의 상상과 기대를 벗어나는 것이며 우리가 그의 거룩하심 지혜,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을 고백하는 내용보다 더 큰 것으로 “하나님께 있도다.”인 것이다. 우리의 상상은 우리의 지능지수에 머물고 있다. 그 너머에 있는 것 그것을 '영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도한 ‘능력’은 심판으로 인하여 계시된 능력이다.

2절 찬송의 결국은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보상 자, 구원의 완성처럼 살고 있는 것이며 그 현실에서 성도의 싸움인 것이다. 3절 둘째로 ‘할렐루야’ 등장하는데 아무리 찬송을 해도 부족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오해의 소지는 할렐루야 찬송이 하나님 앞에 받쳐지는 것이므로 이 내용도 즉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으로 보이는 오해가 있지만 바벨론 심판의 연기인 것이다. 관련구절로 사34:9~10 에돔의 멸망을 묘사하는 중에 "연기를 올라간다."는 것을 차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와 ‘연기가 끊임없이 올라가더라.’ 대조 되는 것이다.

4절 셋째로 할렐루야가 등장하는 것인데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로 네 생물과 24장로이며 마치 답 송으로 나타내고 있다. 구원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경륜이요 심판이요 성도의 찬송을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6절 하늘의 허다한 음성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구원의 내용이 전인격적 이해와 모든 것을 쏟아 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찬송이다. 마치 100세 출생한 이삭을 제물로 받칠 만큼 아브라함이 얼마나 하나님께 항복을 했으면 받칠 수가 있을까? 또한 롬11:30~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과 신앙에서 실패 했다는 것은 이방인에게 구원의 길이 막혔다는 의미가 된다. 왜냐하면 제사장 나라 노릇을 해야 이방의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방인에게 구원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원래 이스라엘이 성공해야 이방인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거절하는 바람에 마치 수도 호수를 이방인에게 돌렸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불순종하였지만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지 않겠느냐? 그런 구원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라는 것이다. 그것을 또한 누가 문제를 삼을 수 있느냐는 논리로 11장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결론으로 36절인 것이다. 억지로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식으로 이야기 하면 더 양보하셔서 둘 다 구원을 하시는 분이다. 누가 원인을 제공하여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느냐? 하나님만의 긍휼이라는 원인을 가지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반하고 배반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참으시고 또 참어 구원을 만드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렐루야 찬송인 것이다.

교회사 속에서 3가지 현상들이 나오는데 먼저 핍박. 둘째로 핍박을 견디고 나서 융성할 때 이단의 등장하며 셋째로 핍박과 이단 앞에 있을 때 분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제 시대 신사참배로 순교자를 배출한 그룹. 또한 신사참배를 타협한 그룹 이렇게 나누어 지는데 해방과 전쟁이후에 순교자 그룹이 한국교회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변방으로 밀리는 현실을 우리는 보게 되었다. 타협한 그룹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정치적인 주도권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을 더 잘 감당하였다는 것이다. 순교자를 배출한 그룹은 끊임없이 과거 신사참배 반대만 이야기하면서 계속 된 용서와 화해를 현실 가운데서 놓친 결과로 타협한 분들의 그룹이 더 많이 하나님 앞에 사용되어지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는 것이다. 믿음과 신앙을 지켰다는 것은 늘 성공했다, 늘 승리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때로는 실패를 하였다 때로는 넘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성도의 찬송이며 더 나아가 우리의 넘어짐이 실패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렇게 하여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찾아온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성경과 계시록의 기록되었으며 이 찬송대열에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단 일명도 낙오 되지 않도록 합시다.

계19:6-8 넷째 할렐루야 찬송 부분이다. 종합적인 찬양으로 6절에 기록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1-3번째 할렐루야’가 바벨론 멸망을 주된 내용이라면 이제 더 적극적인 면을 가지고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 다시 말하면 바벨론 멸망과 또한 어린양의 혼인잔치 두 내용을 포함한 것이다. 계11:15~18 일곱 나팔 장면에서 묘사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고 그가 왕 노릇하고 하나님 통치의 완성은 두 가지 면으로 묘사 되고 있다. 부정적인 면으로 원수들의 심판과 또한 긍정적인 면에서 어린양의 혼인 기약인 것이다. 

계 21장 이후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 신부는 교회로 지칭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신랑이 되고 교회가 신부가 되어 영원한 나라를 이루는 것으로 종말을 묘사하고 있다. 호 2:19~ 20 구약 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자녀라, 아내라’ 하여 고급한 대접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백성들에게 약속을 하고 있다. 그 약속의 성취를 사도요한이 보고 있는 것이며 그 찬송으로 4번째 할렐루야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양의 혼인기약은 통치의 완성이며 동시에 신부인 교회가 완벽한 준비를 "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 인 것이다. 여기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구절인데 성도의 책임의 몫으로 이해하게 되면 전체 성경에 반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신부의 자리가 각 성도들의 책임져 얻는 자리인가? 예를 들면 고문을 못 이겨서 '예수를 믿지 않는다.' 고백한 것이며 물론 믿는 대로 다 지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 부분은 우리의 신앙은 전전긍긍 하면서 지키는 것이 실상이다.

본문에서도 혼인기약의 이르자 교회를 예비하러 오실 때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는가는 "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였은즉"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한 은혜이며 영원성과 결부 된 것이며 이 말씀은 성도에게 방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하나님의 어떤 분이신가? 알게 하며 창조와 구원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시는 분으로 허락 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지 마치 한 번 고백한 후 그 다음에는 내 책임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마치 범죄 한 죄인에게 제2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므로 이후는 네 책임인 것이다 이런 식은 아닌 것이다. 창조와 구원을 하나의 돌발 상황이라는 개입 정도로만 알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충성, 헌신했다. 이렇게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진정한 경외, 항복, 찬송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믿음이 우리의 자랑과 절망으로 갈 수 없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것이다. 그 내용을 알고 찬송이 6절의 종합적인 할렐루야의 내용인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완성 다시 말하면 대적 자들의 심판과 구원의 목적 자들의 구원의 완성을 보는 것이며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찬송을 하고 있다. 8절에서 성도들에게 세마포(빛나고 깨끗한 것 영광, 성결함을 묘사)라고 하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이루셨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저들의 행실이 되도록 입히셨다는 것이다. 대게의 경우 죽도록 충성하면 상 받고 그렇지 않으면 부끄러운 구원으로 우리는 이해가 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롬 5:1-5 구원의 과장에서 환난과 인내가 나온다는 것이다. 현실 가운데서 성도들의 공통된 내용은 믿음의 실패들인 것이다. 믿음이란 기독교에서는 대상에 관한 것이며 내용에 관한 것은 아닌 것이다. 실패하면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고 우는 것은 좋은 믿음인 것이다. 그렇지만 승리와 감격 속에 올 수가 있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간다.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내 실력, 의지를 버리고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성경은 요구하기 때문에 실패가 있는 것이다. 깊은 성공은 내 안에서 일하는 게 나인지 하나님 내 안에 들어와서 하는 것인지 모르는 것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순종과 인내인 것이다. 하나님 통치는 구원하는 백성들의 구원의 시작이요 완성이요 하나님께서 허락된 것이 이유와 원인인 것으로 책임자로서 그리고 아버지라는 것을 찬송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주권자이신 것은 심판과 맞물려서 백성들을 변호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양심, 말씀이 우리를 고소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을 심판하고 우리를 변호한다는 것이 찬송인 것이다. 잘하면 상 받고 못하면 벌 받는 것으로 이해가 아니고 한 심하고 갈 길이 멀지만 결코 실패함이 없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어서 오십시요” 로서 종말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 오시면 큰일인데 이렇게 가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나를 홀로 책임지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록 된 것이며 말씀이 우리에게 증언하여 성도가 누구인지? 성도에게 허락된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이지! 그것을 알고 신앙현실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계19:9-10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다. 초청받음, 택함, 유효한 부르심이며 계17:14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와 같은 자들이다.” 왜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설명되는가? 계17장부터 계19:8절까지 바벨론 멸망을 기록하고 있으며 죄의 대표적 성질, 대적들의 유혹, 사치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유혹에 굴복한자들이 멸망인 것이다 그들의 복은 바벨론과 타협되지 않는 자이며 헛된 것에 맡기지 아니 한자로서 복이 있는 것이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유일한 주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며 바벨론의 끊임없는 유혹과 대조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거짓된 유혹과 대비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그러나 본문의 중심주제는 10절이다. 요한이 왜 천사에게 경배 하려고 했고 못하게 했는지? 그 이유는 분명하다 천사 역시 경배를 받을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종이며 사역자인 것이다.

그러면 왜 경배를 하려고 했을까? 그것은 영광이 너무 커서 하나님이 아닐까 착오를 일으킨 것이며 그런데 왜 이 내용을 기록하는가? “예수의 증거”를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증거는 계1:2, 12:17 예수의 증거란 그리스도의 지상사역, 십자가 사건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성육신과 죽으심의 결과가 모든 성도에게 예수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主라 시인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신 것과 또한 죄를 씻을 다른 방법이 없으며 그 문제를 해결 할 분은 하나님만이고 그것을 성도는 성찬에서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즉 주인 되시고 심판자, 구원자라는 고백이 포함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행하여 성도라는 것이 존재하고 성도는 약속된 그날까지 권리와 책임으로 신앙생활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는 것은 전하고 증거를 하든지 증거 하는 자가 핵심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신 것이 핵심인 것이다. 곧 예수가 대언의 중심이다 우리 모두는 동일하게 계획하고 결과 한 자도 아니고 오로지 은혜를 입은 자니까 오직 하나님만 증거 하라는 것이다.

교회라는 것은 성직체계로 유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증거로만 내용과 권위를 가지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봉사는 있다 그러나 지위와 계급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만인제사장설이며 그러나 성도는 봉사에 대한 보람도 보상도 없을 때 당황하게 된다. 또한 내 신앙도 발전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에서 영향력도 없는 것 같고 어떤 것을 습관적으로 어떤 것은 체념하게 되어 우리 기대와 다른 것에 당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의 증거에 있다. 다시 말하면 몸끼리 결합하여 힘을 내는 존재가 아니라 봉사 ,은사의 모양이 다른 자라도 머리와 연합된 일체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십자가, 재림을 근거로 성도의 요구와 책임을 가지고 각각 그리스도와 말씀 앞에 반응 하고 책임을 가져야한다. 우리가 하는 사역이 차원 높은 일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이런 것이 아니며 오직 성도 자기에게 묻고 그것을 기회로 가르침으로 또한 반성으로 있는 것이다. 1차적으로 무형의 교회 (그리스도와 연합)가 우선 근본이며 그 안에서 가장 큰 내용으로 자신을 돌아봐야한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가장 큰 오해는 교회 전체에게 책임을 넘기게 때문이다. 예수의 증거에 성도의 반응으로 개인적 책임만 가지면 된다.

교회가 사랑이 없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계시록 기록 당시에 상황은 핍박 상황이다. 즉 매국노, 상업(우상숭배)불가하였으며 그런데 교회가 힘을 내고 보이는 보상으로 즉 하나님만 유일한 신이며 그의 백성들을 변호하여 로마황제를 물리치는 것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의 책임을 가지고 교회는 이것을 권면하고 있다. 교회가 ‘이래야 저래야 된다 하기 전에’ 개인적인 민감한 자기점검을 하지 않으면 개인의 책임을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말씀 앞에 서 있는 것이며 자녀로 붙잡힌바 되고 답하여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책임과 내용이 되는 것이다 전하는 천사의 영광에 한 눈을 팔지 말고 훌륭한 일, 명분의 있는 일에 책임을 전가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에 마땅히 부응하는 사랑과 헌신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한다. 예수를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냐. 단번에 끝나는 결과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승리해도 이기 것 같지 않는 긴 세월의 인내 속에 신앙생활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매순간 반응 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촉구, 가르치는 곳이 교회이며 반응하는 것이 성도에게 복이며 하나님이 사랑. 거룩 부름에 신앙 양심과 책임 있는 반응을 하는 자녀다운 인내와 순종이 있기를 기도한다.

계19:11-16 본문은 드디어 주님의 재림의 모습이 등장한다. 12:1~사단의 패배(하늘의 자리 빼앗김, 그리스도 구속과 성도를 변호하심은 성도를 구원하시고 속죄하심을 이룬다)사단의 땅으로 내려와 더 큰 분 냄으로 또한 힘을 내어 싸우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 등장하는 것이다. 13:1~사단의 대행자(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13:7~ 땅에서 올라온 짐승) 17:1~ 바벨론 심판, 20:7 ~ 마지막 사단의 심판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사단의 패배의 시간적, 순서적 사건으로 배열이 아니며 시간적으로 표현하면 하나의 사건을 여러 가지 관점 (두 짐승, 대행자 음녀, 바벨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멸망은 역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18:1~ 바벨론의 멸망 19:19~ 두 짐승의 심판과 멸망  20:7 ~ 마지막 사단의 심판과 멸망을 기록하고 있다.

반 기독교적, 반 하나님 적인 죄악 된 수족들로서 어디서나 언제나 늘 있어왔던 것들이다. 각각 하나씩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은 사단의 세력과 힘과 유혹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실패케 하고자 하는 것으로의 기록이며. 각각의 종국의 멸망이 어떻게 되는가를 기록하는 것이 계시록의 관점이다. 마지막 심판과 멸망 때(여러 가지 표현으로 되어 있는 대행자들) 사단은 결국 멸망인 것이다. 사도요한의 기록인 "내가 보니~" 이 문장은 장면의 변화이지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종말의 마지막 장면으로 아마겟돈 전쟁이고 그리스도의 재림인 것이다. 

또 하나는 사단의 멸망인 것이다. 그래서 20:1~6 오해된 역사적 전 천년설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은유적으로 앞부분(계16:16~,계17:11~)에서는 표현해 오다가 비로소 계19:11~ 드러난 것이다. 악한 세력과 어린양의 싸움으로 묘사하는 것은 전투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 실제 두 세력이 싸움, 충돌하는 것이 아니며 다시 말하면 대등한 세력이 아니고 단지 사단의 발악이며, 이미 진 싸움에 사단의 꿈틀거리는 정도이다. 성도는 악의 유혹, 세상 앞에 늘 지는 것 같고 주변 여건들이 다 사단의 쪽에 속한 것처럼 느껴진다. 계시록 기록 당시에 상황을 보면 로마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 같고 암담한 현실로만 계속 다가오는 그런 시대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죽음을 정복한 어린양이 승리라는 것이다. 성도가 실력 없음, 한심함이 우리 실력과 실패가 아니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반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승리가 어린 양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마16:16~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다. 결국 그리스도가 실패해야 우리가 실패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이미 승리하시고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우리를 십자가 사건으로 묶었던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성도가 신앙이 좋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남 다른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가 피난처, 그리스도를 누가 많이 동원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고후4:7 ~ 참다운 신앙은 나의 부족을 지적하게 되며 “예수 죽은 것을 짊어지고 있으며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고전15:51~ 부활을 논하면서 적군들의 하나님을 대항 했으나 멸망했듯이 백성들의 변화 된 몸을 받는 것이다. 결론은 고전 15:58절인 것이다. 온전한 승리는 종말기간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그러므로 믿음의 필요한 것이다 그 온전함을 위해서 마지막 장면을 생생하게 계시 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복과 영광과 승리의 결과인 것이다.

계19:11-16 12절 이하 그리스도의 재림 모습 묘사 "그 눈이 불꽃같고"-모든 비밀 관통. 그의 심판을 속일 수 없다(계1:10-19절 등장) 교회를 지키시며 승리를 위하여 임한다. "또한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사단과 짐승의 면류관과 대조(계12:3 13:1 거짓, 한시적인 것이며 모든 주권이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계2:17 너무 엄청나게 변해서(영광의 완성) 성도의 승리의 모습은 누가 봐도 모른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인격 속성 깊고 이해할 수 없다. 즉 심판과 구원과 은혜와 완성을 위하여 오시는데 굉장한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리라 연상하게 되는데 아직 전쟁 장면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내용을 상징화 하는 것이다. 구원의 완성으로 오신다. 종말은 두려운 날들이 아니다. 성도는 찬송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 하더라"- 표현과 신앙적 사상에 일관성이 있다 요1:1-3 그리스도의 인격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역할이 하나님께서 하신약속을 지키신 것이라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충신과 진실이라"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하여 충신이며 진실이다. 역사와 운명은 그 시작과 결과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성도는 올바른 시작을 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초대교회(정치, 사회적 어려운 환경에 처했지만 수신자에게 위로요 확인이다) “너희에게 준 끝을 봐라” 는 식이다. 크리스마스 수전노 ''''스쿠르지에게 장래 일을 보여주고 회개한 것처럼 오늘을 이기게 하고자 이 환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신자답게 유혹과 위협과 시험 속에서 충성하여 세상에 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14절 이하 심판에 대한 묘사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하나님의 말씀, 대적들을 격파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전투에서 승패는 힘의 우열로 판명되며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라는 힘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헛된 것에 미혹되지 말라 하나님의 영원한 것에 붙들어 매라는 것이다. 기적적으로 적들을 심판하고 또한 그의 백성들을 구하는가를 드라마틱한 것으로 가지 말고 진리 됨 때문에 승리하는 것이고 무엇이 진리인가는 영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진리의 심판을 다른 각도로 묘사하고 있다, 심판의 철저함을 묘사하고 있다.(계2:26,12:5,시2:7~9)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포도즙으로 나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즉 처참한 모습을 차용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심판의 완전성, 절대성, 필연성이다. “검”, “철장”, “포도주 틀” 3중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사63:1~ 본문에서 이상한 것은 ‘싸우는 모습’은 없다. 계19:17절 이후 패배한 적들을“~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모습만 나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싸움은 대등한 것이 아니며 대등한 반대하는 죄악 됨과 거스르는 의지를 발동 할 수는 있으나 결단코 대등하지 않다.

결론은 “하늘에 있는 군대들”- 군사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승리를 이미 소유하고 예수님을 따라오는 것이다. 즉 이미 승리로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전투를 위하여 참여하거나 결과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즉 성도는 신앙을 지키면 언제나 승리한다. 최후의 심판에 그리스도와 사단은 싸움이 없는 것이며 재림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각자의 신앙을 지키는 싸움 밖에 없다. 이 세상은 없어지며 신천지로 부여받는다. 시민으로서 국가를 위하여 기도는 하지만 기독교인으로 세상 질서를 압도하는 심판권이 성도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며 종국에 가서야 주님께서 그 심판을 행하신다.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하나님만이 진리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심판권이며 구원에 피 뿌린 옷에 근거가 있는 그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승리해서 가진 것이 아니라 그 분만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지는 심판권이며 구원인 것이다

계19:19-21 계 19:11-16 예수 그리스도를 승리자로 주권자로 묘사하고 있으며 17-18 악한 세력 및 추종자의 파멸을 나타내고 있으며 19-21에 악한 세력의 지휘관 격인 짐승(바다. 땅) 포박과 추종자의 파멸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즉 아마겟돈 전쟁인 것이다. 계 16:12-16 이미 기록한대로 악의 세력의 마지막 심판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다시 확인 할 것은 계시록은 연대기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계시록은 하나의 사건(주제)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계8:12-13, 9:12,(다섯째나팔, 첫째 화) 11:14(여섯째 나팔 둘째 화) 계11:15 일곱째 나팔‘셋째 화’로 설명 그런데 그 내용을 본문은 기록하고 있지 않고 있으며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셋째 화’의 내용으로 계19:19절이 되는 것이다. 계19:11-21 짐승의 멸망을 다루는 것이며 계 20:7-10 사단의 멸망의 등장하고 둘 다 아마겟돈 전쟁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세상은 악한 풍조와 자기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12-14장) 역순으로 멸망하는 것으로(17-20장) 기록하고 있지만 결국은 함께 그리스도의 심판아래 멸망하는 것이다. 또한 “그 나머지는” 즉 사단의 운명과 심판은 설명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설명을 계 20:11-15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어떤 순서나 방법으로 멸망하는가에 초점이 없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계 20:1-6 전 천년이 논리가 아니고 ‘결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패배이며 그 대행자로서 짐승들의 활동이며 다시 말하면 치명적인 패배를 한 사단이 발악을 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허락된 구원의 완성과 승리의 완성을 주실 날로 종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광의 면류관을 씌우게 하기 위하여 세상과 현실을 허락하고 있다는 것이며 고난과 자존심에 민감하지 말고 필연적으로 임할 종말의 때에 찬송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죽는다는 것이며 이런 분명한 결론을 확인하고 매일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충성과 인내가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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