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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말씀잔치를 시작하면서 18장
요한계시록말씀잔치를 시작하면서 18장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23.11.25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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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에서 천사의 해석인 음녀의 환상을 소개받았으며 음녀는 곧 바벨론이며 내분으로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룬 심판을 받을 것이다. 18장은 음녀인 바벨론의 멸망 자체를 다루고 있으며 19장1절부터 8절까지는 바벨론 멸망의 의미를 소개하고 있다.
강영철목사
강영철목사

계18:1-3 17장에서 천사의 해석인 음녀의 환상을 소개받았으며 음녀는 곧 바벨론이며 내분으로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룬 심판을 받을 것이다. 18장은 음녀인 바벨론의 멸망 자체를 다루고 있으며 19장1절부터 8절까지는 바벨론 멸망의 의미를 소개하고 있다. 그의 멸망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찬송이 되는 일이며 천국이 이제 문을 열게 되었다는 설명하고 있다. 연결 적 차원에서 영원한 나라를 시작하기 위해서 반대하는 것들을 먼저 심판해야 하기 때문이다.

1절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절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파괴, 벌 받음과 벌의 무서움을 우리는 기대하고 있는데 기대와는 다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구원과 (생명과 거룩)대조 되는 개념으로 심판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3절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하더라" 바벨론의 심판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음행,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 골3;5 같은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 외에 소원을 두는 것은 우상 숭배이며 기독교 신앙은 어디에다 영향을 받느냐 하면 윤리. 도덕(옳고, 그름) 일반적인 종교에서 대게의 경우 받게 된다. 그러나 기독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진정한 생명이 가지는 가치, 의미, 보람, 영광이며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기쁘고 즐거운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기능적인 것이 아니다. 즉 무엇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며 성도에게 무조건적인 희생과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기준하여 양보하라는 것이다. 갈5:22 ~십자가, 자기부인, 겸손을 이야기 한다. 즉 세상의 것으로 만족을 삼지 말고 진정한 것으로 가져가라는 것이다. 잘했다 못했다는 차원이 아니고 잘 하면 잘한 만큼 이익이 되는 것이다. 요10:10 “더 풍성히~” 생명의 가지는 풍성이며 죄악 된 것은 썩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것은 가진 것만큼 무성함이 계속되어지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둘을 대조하는 것이다. 영원한 약속과 대조되는 것으로 심판이 되는 것이다.) 엡1:3~ 하나님이 우리의 찬송, 감사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받은 것이 얼마나 넘치는 것인가 그 내용과 가치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기능적으로 구원을 논하는 경우가 많다. 죄로 기준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다. 새롭고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것을 비교하는 것이 우선이다. 세상의 풍조의 삶의 원리가 사치와 음행이지만 진리를 추적하고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가로 신자 된 자기 판단이 기준을 삼아야 한다. 성도가 가지는 훨씬 본질적인 것은 죄를 벗어나 거룩으로 살며 죄와 갈등하는 것이 진정한 표상인 것이다. 인격과 심령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을 추구하고 의를 위하여 사는 것이 배부른 것이다. 자신에 대하여 만족하는 것이다. 영적 수준이 낮으면 세상의 것으로 만족을 할 것이요 우리의 소원은 외적인 세상적인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요구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신앙 싸움은 세상의 것과(배움 못 배움, 가짐 못 가짐 등)별개의 것이며 우리들 안에 갈증이 세상의 것으로 채워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는가? 분별하는 싸움을 해야 한다.

계18:4-8 바벨론의 심판은 저들의 죄로 인한 것이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만 온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내용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믿는 대상과 관계라는 것이다. 마치 부부관계, 우정관계는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인격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주인이시며 심판자이신 것에 있다. 자기 멋대로 사는 자는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확신한 기준이요 선언인 것이다. 주권자와 심판자 되신 하나님의 당연한 결과이다. 4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바벨론의 심판을 선언하고 있으며 생명이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심판을 선언하고 있으며 결국 신자의 격려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지혜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현실이 고난을 이기라는 것이다. 죄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기 위하여 현실을 회피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며 자신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이 죄인 것이다. 하나님 없는 것, 만족이 없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바벨론을 따르는 현실 속에 살지만 그것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이 우리를 놓아두지 않기 때문이다. 영적인 우리의 내용을 지키기 위한 인내와 충성을 각오해야 한다. 사48:20 “~선포하라는 것을 요구받고 있다.” 이스라엘의 애급에서 구원함을 받아서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는 것과 같은 내용이 된다. 신 7:16 “생명과 씨를 말리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구별을 하기 위해서 말씀 하신 것이다. 삿 2:1“~진멸하라”는 내용이 설명으로“이 땅에 거민과 언약, 단을 헐라” 다시 말하면 저들의 삶의 정신이 이방 정신과 혼합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 없는 삶과 혼합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의 삶의 정황 속에서 바벨론에 있든지 하나님 안에 있는 실천 속과 아니면 타협 속에 있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이 복은 ‘진리, 의, 거룩’ 영광들에 있는 것이고 썩어짐 허망 방탕 죄악 된 본성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일을 내일로 미루고 말세의 신기한 일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 죽음을 각오한 신앙으로 복된 믿음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계시록이 기록되었다. 5절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바벨론은 모르고 있다. (7절 b에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바벨론은 누가 참다운 심판자인지 모르고 있다. 6절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7절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바벨론이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내용인 것이다. 소 요리문답 1문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지으시고 또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들어나는 것으로 영광인 것이다. 자녀가 훌륭할 때 부모가 영광을 받은 것과 똑같다. 인간의 존재 결국은 기준이 하나님으로부터만 내용을 채워야 한다.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없는 자의 무지와 영혼의 결핍을 모르며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혼의 필요는 하나님으로 충족이 되어지는 것이다.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예수를 믿는 가? 약하여서? 도움을 바라고?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영혼의 갈증은 구원받은 영혼의 첫째 감각인 것이다. 믿고 싶은데 안 믿어진다는 것은 성도에게 최소한 증거이며 영적감각인 것이다. 또한 이러다가 하나님에게 벌 받지나 않을까? 나는 왜 안 믿어지지?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감각인 것이다. 주일 성수하지 않을 때 무서움을 가지는 자는 분명한 자녀인 것이다. 그러나 신자로서 0점인 것이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는 아쉽지 않는다. 8절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일순간 의미이며 시간적인 짧은 것이 아니라 돌연히 자체적으로 붕괴적인 의미가 있다. 걱정할 내용이 없는데 돌연히 망하는 것이다.

계18:9-19 땅의 왕과 땅의 상고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의 애통하는 노래이다. 이들의 애통은 바벨론 멸망 자체를 위하여 애통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치부하며 그 근거였던 것이 없어짐을 인하여 애통(10.11절“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바벨론 멸망은 곧 저들의 멸망인 것이다. 바벨론의 멸망 근거와 이유는 (12.13절“~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바벨론을 근거한 세상 적 사치와 부이며 13절 끝 '종들 곧 사람의 영들' 세상 적 사치를 위해서 사람들을 팔고 사는 노예로 여긴다.

즉 바벨론은 인간으로서 대접하지 않고 영혼을 팔아먹는 부와 사치를 누리게 되며 12~13절에 사치의 목록을 기록함으로 시대정신을 고발하고 있으며 인간을 모독 하는 근거라는 것이다.(14절) 헛된 것에 정신을 팔아먹는 것이다. “화 있도다.~ 3번”후렴같이 반복하는 애가는 성경이 하나님 없는 다시 말하면 신앙적 의와 진리를 벗어난 자멸 성을 조롱하는 것이다. 인간존엄은 신앙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율법의 대 강령에서 보는 것과 같이 신앙은 어느 쪽을 택하느냐? 다시 말하면 인간 존엄은 하나님 쪽이고 반대쪽은 사치와 부를 위하여 인간의 영혼을 팔아먹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실천적인 의미에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눅 10:25~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네 이웃을 사랑 하라' 어디까지 사랑하면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인가? 질문에 우리 주님의 대답은 끝 절 36절 비유에서 결론은 강도 만난 사람에서 볼 때 누가 이웃 이겠느냐. 우리 이웃은 하나님의 정하시는 것이다. 물론 1차적으로 장소적, 시간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넓게 보면 한 나라. 직장. 폭 넓은 공동체. 그 이웃 앞에서 저들의 필요에 응하라는 것이다. 요구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작품이며 하나님의 계획, 사랑과 뜻을 둔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신앙점검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 불만이 있느냐 아니면 없느냐로 시금석인 것이다. 백성 된 입장에서 걱정은 하지 않고 정치가 이러쿵저러쿵, 그것은 자신은 고민하지 않고 다시 말하면 나는 가만히 있는 그런 이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희생과 남의 짐을 지라는 환경이 되면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요구하는 이웃 사랑이란 하나님 사랑과 묶여 있는 율법정신 인 것을 놓치는 것이다. 누구로 인하여 손해를 보고 방해받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공시대, 경쟁시대에서 우리교회 일사불란한 것을 잘하는 것이요 신앙이라고 할 때가 많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처럼 가는 것이 신앙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이 현실에서 그런 환경이 오면 사마리아인처럼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케 한 시간과 환경과 조건이 신적 작정에 의한 것임을 놓치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가도 무의미하게 된다. 시대나 나라에 불평을 하게 되는 것은 이해관계이기 때문이며 우리는 기꺼이 바보가 되어야 하며 그것이 신앙정신 인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가 세련된 목사님들은 힘이 들어가고 덜 세련된 교회는 목사님은 상대적으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피한 부모님에게 얼마나 감사한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앙은 굉장한 것이 아니라 세력이나 재력에 관한 싸움이 아니고 인격에 관한 싸움인 것이다. 헛된 것을 위하여 사람의 영혼을 팔아먹는 것이 바벨론이다. 우리나라 정치적 현실에서 불만과 고통으로 살아 왔지만 그것을 피하려고 도망가는 것으로 가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받는 것 보다 져야 할 짐이 많다는 것은 후진국이고 반대로 되면 선진국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신자 된 신앙의 원칙적인 면을 이해하게 된다면 불평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자기부인, 저들의 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그러면 고통과 고난 속에서 감사를 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자의 특권으로 삼고 우리의 신앙을 점검 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계18:20-24 바벨론 멸망을 묘사한 계시록의 내용을 보고 있다.바벨론적 권세, 부, 사치 자랑 득세하다가 하루아침에 멸망을 보았다. 21절 파괴의 철저함 멸망의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20절 애가속에 성도들의 기쁨의 권고를 받고 있다. 성도의 기쁨은 원한관계 해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하셨다는 측면에서 기쁨이다. 다시 말하면 성도가 의지하는 믿음에 대하여 보상이라는 것이며 하나님의 정의, 의 집행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계12:7-12 이하에 연결되는 것이다. 12장의 배경은 사단의 고소자의 지위를 잃게 되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며 세상적 법정으로 이야기 하면 사단은 검사인데 사단이 무력으로 하늘 법정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그의 지위가 할 일이 없는 것 즉 고소할 대상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쫓겨난 것이다. 그 하늘에서 쫓겨난 것을 지상의 역사적 현실로 나타난 것을 본문이 그리고 있는 것이다. 바벨론의 파괴를 21절 이하에 "결코 다시 보이지 않으리라" 6회를 반복하면서 악한 정신 ,자랑, 사치, 허영, 권세 종식되는가를 선언하는 것이다. 렘51: 59-64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시드기야 왕에게 약속하신 말씀의 내용인데 “바벨론 멸망의 책을 받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약속하신 것” 구약 적 배경을 인용하고 있다. 맷돌~ 신랑소리~ 슬퍼하는 자는 그것에 의지하여 치부, 권세, 향락을 누리는 자가 되는 것이며 반대로 성도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정치 경제가 어렵다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라가 잘 살아야 형통이 아니고 성도는 외적 조건은 신앙에는 거의 상관이 없다 건강, 돈, 시간이 있으면 망하는 경우가 많게 된다. 성도들 중에 간혹 이런 이야기를 하는 성도가 있는 데 "잘 나가는 경우에 만났으면 얼마나 감사 할 것입니까" 대게의 그런 경우는 없는 것이다. 23절 이하 바벨론의 심판은 성도들의 피가 보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바벨론이 거슬러다는 것이다. 부가 세력이요, 소원이요, 힘이요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을 반대하게 되었다, 복술로~ 즉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미혹하는 것이다. 가난한 것은 의롭고 정의롭다는 뜻은 아니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며 조건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냐 멀어지게 하느냐 그 훈련을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조건, 환경, 위치에서 만족하며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면 형통도 재앙이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 그것 자체로 복이 되는 것이다. 그 조건, 환경, 위치 자체로 복과 저주가 되는 것이 없다 대게의 경우 성도들은 세상적인 것을 신앙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고통을 기준으로 하고 있지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베드로를 꾸중하는 장면에서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17-18장 전체가 바벨론 멸망을 마치면서 17:1~ 큰 음녀의 심판을 보이리라 ~ 하고 성령 하나님의 사도요한을 데리고 갔는데 음행의 취하고 음녀가 그의 사치가, 권세가 극에 달하고 있어 도대체 망할 것 같지 않은 것처럼 보여기 대문에 기이하게 여긴 것이다. 그런데 연합한 친 우방 즉 대행자가 파괴하는 것이다. 죄라는 것이 기쁨을 약속하는데 언제나 파멸하는 성격인 것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깨닫는 것은 하나님 말씀은 옳다는 것이다. 인생은 덧없다는 것이며 정상적인 지 정 의를 가지고 있으면 인생의 감내해야 할 인생의 짐보다 우리의 실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싸움이 있는 것이다. 계시록을 단순한 종말로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오늘의 현장에서 늘 배우는 것은 이 형통, 사치가 진정한 복이더냐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7~80세까지 살게 하는 것이다.  점점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고 조금씩 하나님 쪽으로 방향을 틀며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실제적인 내용과 유익들이 현실 가운데서 나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지나온 날들을 깨우친 것은 하루아침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잠 잘 때마다 깨우시고 깨우시는 그래서 그 넘어짐 밑거름이 되어서 넘어진 것이 그냥 헛된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하나님께 의지하며 하나님의 진실하심 의로우심을 각성하게 되어 쌓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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