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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신(神)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23.07.27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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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이미 이데올로기에 메여 사는 노예들은 자기 자신의 이성(理性)과 자유의지(自由意志)를 도난당한 사람이다. 자유민주주의에 노예된 체험 식민과 막시즘에 노예된 학습 식민은 이미 과학적 사고도 불가능하고, 객관적 판단도 할 수 없으며,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고, 자기 프레임으로 모든 사물과 사건을 판단하는 자기가 자기를 잘 길들인 스스로 자기 사상의 맹목적 행동 도구가 된 것이다. 지금 한국은 이데올로기 충돌로 연간 300조원을 허비하고 있다고 호주 언론이 꼬집는 것은 결코 빈말이 아닌 것 같다.

1900년대 초기 우리 조상들은 처음 막시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천지개벽하는 것같은 논리였을 것이다. 서양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해서 자유민주주의를 들어도 역시 천지개벽이었다. 고종(高宗)이 분간 없이 헤매는 대한제국 아래서 그래도 고종을 전하(殿下)라고 자신을 규정짓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사회의 주체이다’라는 말과 ‘절대 군주는 없다.’ 다만 대통령을 국민이 뽑는다는 이야기에 하늘이 깨어지고, 땅이 꺼지는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 이데올로기를 처음 접했던 시절의 조상이 살던 세상과는 사뭇 다르다. 답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처음 이데올로기가 전해질 때는 러시아나 중국 쪽에서 들은 조상들과 서양선교사들로부터 들은 자유민주주의 중 어느 것이 인간살이에 유익한 것인지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50년에서 1953년까지 피터지게 싸웠다. 한국전쟁이다. 이젠 실제 그 열매를 우리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삶에서 체험하고 있다. 지난해 무역 규모를 보자. 남한은 1조 4,149억 5,000만 달러(한화 약 1,815조원), 북한은 15억 9,000달러(한화 약 2조 383억원) 대한민국의 무역액은 북한의 890배이다. 한국의 수출 품목을 보면 반도체, 석유제품, 자동차 등이다. 세계 6위 수출국이다. 북한은 여전히 비단이나 가발, 조화 같은 경공업이나 석탄 등 1차 산업이 주요 수출품이다. 한국의 1960년대의 수출 품목과 유사하다. 오는 27일 6.25 한국전쟁 정전(停戰) 70년이다.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며 G7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반면 지금도 북한은 고난의 행군 중이다. 고난의 행군이란 허울 좋은 간판 아래 아사 직전으로 인민들이 몰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1인당 국민 총소득 (GNP)은 각각 4,048만원과 142만원으로 28.3배 차이가 난다. 2021년 기준 자동차 등록 대수는 한국은 인구 절반에 가까운 2,491만대인데 북한은 25만 3,000대이다. 2020년 이동통신 가입자는 7,150만명인데 비해 북한은 600만대이다. 11배를 웃돌았다. 이러한 통계를 보면서 대다수는 체제의 차이라고 말한다. 즉, 이데올로기에 의한 국가 경영에 그 이유를 들고 있다. 물론 이 논리는 맞다. 그러나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막시즘은 인간의 본능을 무시하기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있다. 막시즘은 인간을 학습하게 하여 이상적 새 사람(new man)을 생산해 내고, 토지공개념의 바탕 위에 노동자는 노동하여 균등 분배하는 사회를 이상으로 삼았다. 즉, 사유재산 의식이 인간의 의식에서 삭제하고, 학습을 통해 이상적 노동자를 만들고, 함께 노동한 대가로 누구나 공평하게 나누어 사는 이상 국가론을 위해 일당 집권으로 인민을 폭압, 통제해간다. 결국 전체주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학습으로 본능을 통제할 수 있다고 지나친 긍정을 가졌다. 결국 인민을 잘 길들인 인간 로봇을 만드는 것이다. 현금 중국과 북한이 대표적인 나라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시장경제는 본능을 이용한다. 능력만큼 소유하고, 능력만큼 이익을 향유한다는 것이다. 이야말로 야생이 사는 정글의 법칙과 다를 것이 없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사회가 된 것이다. 이 자유민주주의의, 결국은 “내가 불행하니 남도 불행하게 만들어야 되겠다”는 한 젊은이의 절규와 분노로 인한 살인사건이 대표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의 청년들은 희망이 없다. 외국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학위를 획득하고, 대학의 교수가 되었어도 집 없는 교수는 전세대출 이자 내고 나면 생활비가 없다고 한숨을 쉬고 있다. 반면 부모의 유산으로 집을 마련한 자녀들은 떵떵거리고 산다. 다시 말하면 한 개인이 능력껏 산다는 말 자체가 출발점이 다른 단거리 경주를 하고 있는 현실이 자유민주주의다. 이젠 이데올로기를 빙자하여 좌이다. 우이다를 간판 걸고 정치권력을 잡고 이데올로기를 빙자하여 자기 배를 채우려는 간접민주주의도 벌써 사기 행각이고, 눈속임이다. 어느 누가 국가나 타자(他者)를 위해 인생을 사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제 한 가지만 남아 있다. 그것은 IT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것이다. 즉, 국회를 해산하고, 전 국민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다. 입법부의 권한을 국민에게 돌려주자는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 중심제가 아니라 사회 각 계층의 분야별 전문가들이 모이는 국가운영위원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운영위원회에서 정책 입안을 하고, 집행은 현 정부와 유사한 공직 체계를 만들어 집행만 하는 즉, 만민의 진정한 섬김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등종교로 하여금 철저한 윤리와 신앙을 가지도록 국민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기독교 윤리 없이는 국민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북한과 남한의 근본 차이는 북한은 신(神)이 없다. 무신론(無神論)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은 유신론(有神論)이다. 신(神)이 있다. 신은 볼 수 없다. 그러나 남북을 보면 안다. 신(神)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함께 사는 것이다. 초월의 신은 실존적 신이 되어야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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