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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특집 나라 잃은 설움을 잊지 말라
8.15 특집 나라 잃은 설움을 잊지 말라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22.08.1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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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해방과 광복, 그리고 독립
올해로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된 8.15 광복절 77주년을 맞이하면서.
이인수목사 (전)온누리수련원장 국가유공자 6‧25 참전,무공수훈

요즘 우리 국민들 중엔 광복절 노래가사를 제대로 생각하며 불러보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 날이 40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건가 지난일을 잊을건가. 다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닿게. 세계에 보람될 거룩한 빛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정인보 작사, 윤용하 작곡).

자유는 절대로 공짜가 아니다. 이제 전국민이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심을 더욱 강화해야 할 것이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앙고백서 제8장에서 말하고 있는 국가관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기관을 찾는다면 역시 국가일 것이라는 것이다. 국가는 정치, 경제, 문화, 우리들의 제반생활에 막강한 힘을 가지고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다른 어떤 기관도 국가와는 비교될 수 없을 것이다. 국가는 우리의 모든 삶을 장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또 심지어는 처참한 전쟁까지도 일으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그러한 권한까지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국가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우리 그리스도인은 두개의 국적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고 또 하나는 이 땅의 국적을 가지고 있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의무를 지고 권리를 행사하며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 제1항에 보면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 안에서 그가 소속한 민족을 사랑하고 국가에 복종할 의무가 있음을 믿는다. 지상의 권세 자체가 하나님의 권세를 대행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지상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 권세를 지상의 특정인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도 지상국가의 법과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항목에서 3가지를 생각해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민족, 자기국가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애국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에스더만 해도 자기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왕 앞에 나갔다. 자기 생명과 맞바꿀 각오를 가지고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한 애절한 심정을 항상 가지고 살았다. 로마서 9장 3절에 보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서’라고 했다. 이 말은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에게 떨어져서 지옥에 간다 할지라도 내 민족이 구원을 받는다면 차라리 그 길을 선택하겠노라 하는 것이다. 자기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면 자기 하나 저주를 받는 것은 두렵게 여지기 아니하겠다는 내용이다. 그 정도로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애국했던 것이다. 신앙고백서 제5장에 보면 국가가 불의의 세력에 의해 침략을 당했을 때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서 일어나 불의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고 가르친다.

해방과 광복 그리고 독립

1945년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된 날이며 동시에 우리의 주권이 회복된 광복의 날이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48년 8월 15일은 독립의 날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역사는 일찍이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역사이기도 하다.

성경에 이스라엘 역시 애굽(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하는 감격을 경험했고 광야 40년의 생활을 청산하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 회복하는 광복의 경험을 가졌다. 그 후 혼란의 시기를 거친 다음 사울을 임금으로 세움으로써 명실공히 독립국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이었고 다시 종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 광야 40년 세월을 했던 것을 잊고 있는 그들에게 ‘그 옛날의 역사를 기억하라. 역사를 잊은 국민은 미래가 없다.’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했고(갈 5:1), 솔로몬 왕은 지난날의 쓰라림을 회상한다는 것은 달갑지 않으나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라 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으로 우리나라를 통째로 삼켰을 때 온 국민은 비탄에 빠지고 말았다. 그 때에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여 그 세력을 확대해 중국을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에 가장 장애물은 교회였다. 일본은 이러한 조선교회를 박멸해 버리든가, 아니면 일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교회로 만들든가 결단을 내리도록 했다.

그래서 1935년 신사참배 강요문제가 한참 극성을 떨던 때에 많은 교인들이 참배거부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과 옥고로 죽음을 당했다. 이러한 일제강점에서 독립을 하겠다고 발버둥치며 독립만세를 외치던 열풍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 때에 신사참배 운동을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며 고통스럽게 지내던 이기수 목사님을 어느 날 경찰국장이 국장실로 불러 놓고 하는 말이 ‘목사님, 연세도 많으신 분을 이렇게 고생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면서 편지 한 통을 목사님 앞에 내놓았다. 그것은 공학박사가 된 목사님의 큰아들이 보낸 편지였다. 그 편지 내용인 즉, ‘다른 목사님들은 신사참배를 하고 편히 사는데 왜 아버지만이 유독 신사참배를 반대하시면서 그렇게 고생하고 계실게 무엇입니까. 겉으로는 신사참배를 하면서 속마음으로만 안하시면 되지 않느냐’라는 내용이었다.

‘아드님 편지를 보시니 생각이 어떠십니까?’라고 국장이 물었다. 목사님은 대답하기를, ‘세상 지식으로 말하면 나는 지식이 많이 없지만 아들은 세계가 알아주는 공학박사이니 지식으로 보면 내 선배 격입니다. 또한 혈육의 관계인 부자 간의 입장에서만 생각해도 아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적으로 말하면 이 사람은 평신도이고 나는 이 사람을 지도하는 목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사참배 문제는 신앙에 관한 문제이므로 교인인 아들이 아버지가 고통 당하는 것이 하도 딱해 보여서 철없이 하는 말이니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일본경찰국장이 목사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겠다고 말했다 한다.

그러나 춘원 이광수는 당시 일본 총독으로부터 매월 600원(지금 돈 450만원)을 받고 동아일보에 조선민족계론의 논설을 통해 조선민족에게는 희망이 없어 일본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글을 공공연히 개제했다. 이처럼 민족의 지성이 이런 말을 할 때에 시골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였던 윤동주(28세) 시인은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용으로 죽으면서도 노래하기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예배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려있다’했고, 또한 조선의 한 지성인은 ‘슬프다 동포여 아는가 모르는가 꿈을 깨었는가. 수십평의 가옥도 나의 집이 아니며 시냇가의 물도 나의 물이 아니다. 내 몸이 죽어서 묻힐 땅이 없으니 눈물을 금할 바 없이 울분을 제할 수가 있겠는가’라며 탄식했다고 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었을 때 검사가 문초하기를 ‘너는 민족운동을 그래도 계속 할 생각이냐’라고 묻자, ‘그렇다. 나는 밥을 먹는 것이나 잠을 자는 것도 다 대한독립을 위해서 했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지는 그날까지 변함이 없다’라고 했다 한다.

또, 월남 이상재 선생은 매국노 이완용과 손병준에게 ‘대감들은 나라를 망치는 일을 꾸미는 데 천재들이니까 일본으로 이사가면 일본이 망하게 될 것이니 어서 일본으로 떠나가라’고 했다 한다.

제헌절 국회구성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을 맞고 남한에선 3년 간의 미 군정기를 거쳐 1948년 5월 10일, 우리 제헌국회 구성을 위해 한국민족의 역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해서 5월 31일 국회의원 198명으로 구성된 제헌국회가 개원되었다. 제일 먼저 그 당시 이승만 장로님이 국회의장으로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하고 이운영 목사 의원에게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한 다음, 개원사에 참석한 서재필 선생을 단상에서 축사하도록 요청해 독립운동의 선배들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처럼 제헌절을 맞은 그날의 큰 감격을 되새겼다.

애국, 매국 분명히 가렸어야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후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과연 한 일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민족정신을 살리는 일을 했어야 하는 그런 아쉬움이 들게 한다. 일제시대에 친일파들과 민족 반역자를 한 그런 사람들이 해방된 조국에 바쳐져야 하는 문제를 우리 선배들은 하나로 처리하지 못하고 그냥 우리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정신이 죽은거나 다를 바 없는 부끄러운 길을 걸어온 것이다. 적어도 일제때에 애국운동을 한 사람과 매국운동을 한 사람을 분명히 가려놓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일제 때 누가 친일파이고 누가 애국자인가를 바로 가려서 민족 정신을 바로 세울 때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민족에게 뭔가 뼈대 있는 교육을 했어야 했다. 사실 친일파의 일부는 당시 사회 곳곳에서 지도자로 계속 활동했으니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 아니었겠는가. 민족을 못살게 굴었던 민족 반역자인 그들은 민족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어야 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이 자숙하며 사회의 지도층에까지도 있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제대로 가리지 못한 채 해방된 조국의 지도자들에게 바람의 책임이 있다고 하겠다.

끝으로,, 나라 잃은 설움을 잊지 말라.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자의 무고한 팽창정책에 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끌려가 총알받이로 희생되었다.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징용으로 끌려가 죽은 장정들, 살았으나 오늘날까지 조국땅을 밟지 못하고 천대 속에 사는 재일교포와 또 사할린 교포들의 비참한 생활상, 전쟁물자의 공급을 위해 땀 흘려 애쓰고 거둔 농작물이 공출 때문에 영양실조로 죽어간 농민들, 간호원 정신대란 미명으로 끌려가고, 가기 싫은 일본군의 위안부 노릇을 하다가 죽어간 꽃다운 아가씨들, 조센징(조선인) 한도진 하며 차별대우로 압박과 설움을 당한 일 등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부들부들 떨린다.

이것이 나라 잃은 설움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나라를 다시는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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