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6:10 (토)
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1-11 롬11:13-15 다시 영접을 받을 유대인
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1-11 롬11:13-15 다시 영접을 받을 유대인
  • 정원우
  • 승인 2021.12.17 11: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 들어가는 말

여기서 사도는 자신은 분명히 이방인의 사도이지만 자칫하면 그들이 잊기 쉽고, 아마도 오해하기 쉬운 그의 사역의 관점을 분명하게 알려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분명히 이방인의 사도이고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내가 유대인을 잊었다거나 관심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13장을 보면 사도가 유대인에게서 분명하게 돌아선 어떤 계기가 있는데 그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이방인에게로 가리라그의 행동은 이어지는 절들에서 보듯이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유대인을 잊지 않았고 흥미나 관심이 여전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1절에서 말했듯이 유대인들을 시기나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이방인 전도는 유대인들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도는 이방인들도 이 사실을 항상 명심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9장과 10장 처음 부분에서 사도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 본론

첫째, 유대인의 현재와 미래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사도는 비록 자기가 이방인들과 함께 살면서 실제로 그들을 복음화하는데 모든 인생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큰 부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0장에서 반복합니다.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였지만 이 사실을 명심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이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멸시하는 위험을 경고합니다. 한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공동체 밖에 있는 이방인들을 개로 간주했었습니다. 이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총에서 배제된 유대인들에게 똑같이 행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이 말을 기록한 또 다른 이유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두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해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대한 역사의 파노라마를 전개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 대한 문제이며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문제입니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둘 다 포함해야 합니다. 어느 하나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방인들이 겸손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음 진술의 14절로 이어집니다. 거기서 사도는 지금 일어나는 것이 유대인의 몇몇이 구원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전체 논증의 일부로 유대인들이 최종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넘어지는 실족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회복이 있을 것입니다. 당분간은 그들은 실족할 것이지만 일부는 지금도 구원받아가고 있습니다.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걸림돌이 있기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듭 살펴보았듯이 남은 자가 있습니다. 비록 남은 자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크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입니다. 여전히 교회에서 대다수는 이방인이고 유대인은 소수만이 회심하여 들어와 있을 뿐입니다. 사도는 이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계시로 받았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현실에 대해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무관심해졌기 때문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유대인이라도 회개하면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변절자로 간주하는 분파들에 대해서 이런 태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고신도 몇 년 전에 형제 교단과 합쳤는데 그때 들어오지 않고 일부 떨어져나간 교회가 바로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이 진리의 지식을 깨닫고 진리로 나아오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들을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단념하는 것을 극히 주의해야 합니다. 불신과 죄는 나쁘지만 우리는 그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구원을 진정으로 열망하고 그들이 구원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것과 오류나 배교의 죄를 지은 사람을 정죄하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기를 간절히 소원해야 합니다. 이것이 15절에서 발견하는 우리의 위치입니다.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이 구절은 12절을 반복한 것인데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가 반복해서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2절에서 15절로 연결된다고 보면 13-14절은 일종의 삽입으로 보면 됩니다. 그러면서 12절과 15절은 반복교육에 해당합니다. 반복교육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단순한 반복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논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11절 끝에서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3-14절에서는 설명이 조금 확대됩니다. 그리고 12절의 결론에 중요한 부언을 15절에서 합니다. 12절에서 그들의 충만함에 대해 일반적으로 말했다면 15절에서는 구체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 어구는 아주 중요합니다.

둘째, 다시 영접받을 유대인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표준 새번역은 “15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심이 세상과의 화해를 이루는 것이라면이라고 가정하는 문장을 썼습니다. 흠정역도 동일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버림받는 것은 가정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가정을 의미하는 if절이 아니라 사실을 의미하는 since절이 되어야 함을 지적합니다. 한글에는 가정과 사실 구분이 없기때문에 우리도 이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유대인 대다수가 쫓겨남으로 이방인들이 큰 축복을 받았다면, 유대인들이 하나님 안으로 들어올 때 그 축복은 얼마나 크겠는가?”라는 논증입니다. 그 축복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처럼 크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아직도 아직 논쟁 중입니다. 이 표현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표현의 의미에 대한 세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 번째, 어떤 사람들은 사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라는 어구로 유대인들이 회복될 때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불신 가운데 있는 유대인들은 죽은 자들과 같으며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살아나는 것이라고 묘사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의 논점을 완전히 빗나간 설명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유대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1절 처음부터 사도는 유대인의 넘어짐이 이방인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12 ...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누구의 충만함입니까? 이방인들의 충만함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한 사람이 회심할 때나 많은 사람이 회심할 때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이 이방인의 유익입니다. ”내가 특별히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고 있다. 유대인의 버림받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여러분이 화목이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회복은 여러분에게 죽은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너희에게 알려주기 원한다따라서 이 말은 유대인에게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일어날 일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좀 더 바른 노선을 따르는 것 같은 두 번째 해석이 있습니다. 이 해석은 유대인들이 민족적으로 돌아올 때, ’이방인의 교회는 영적 상태가 전체적으로 낮게 추락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이 그렇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들은 사도가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들도 때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 너희 이방인들이 쉽게 자랑하였지만, 그때에는 타락하여 무기력해질 것이다. 어느 정도는 죽을 것이다. 너희는 여전히 교회이지만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유대 민족 이스라엘의 위대한 회복이 있을 것이다. 이 일은 너희에게 축복이 될 것이고 너희는 부활하여 하늘로 들려 올려질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상태에서 새생명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너희에게 큰 소생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사도의 주요논증과 일치하기 때문에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이 해석도 터무니 없는 이유는 먼저, 이방인들이 타락할 것이라는 등의 추정이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문맥으로도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12절에서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했습니다. 사도는 죽어 생명없는 상태와 축복의 상태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부요함을 훨씬 더 큰 축복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대조합니다. 사도는 부요함이라는 용어를 두 번 사용하여 비교합니다. 사도의 논증은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지금 그러할지라도, 너희가 그러한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면 온전히 회복될때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을 것인가?“ 이것이 12절에서 말하는 의미입니다. 교회가 죽음의 위태로운 상태가 된다고 해석하면 하물며라는 말은 무의미해집니다. 이 사실은 15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우리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훨씬 더 강력한 논증이 있습니다. 25절을 봅시다. 이 말씀을 미리 보아두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그릇된 해석을 하면 나중에 어려움에 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부분을 해석하기 앞서서 전체 논증을 이해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2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온 다음에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충만은 무기력하고 거의 희망없는 상태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없고 정반대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주장처럼, 이 말은 지금도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고 있지만 유대 민족이 구원으로 들어올 때, 이방민족의 복음화는 지금까지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아진다는 것도 아닙니다. 25절을 보면 불가능한 해석입니다. 25절은 이방인의 충만함이 먼저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을 우리 주님의 재림과 연관된 죽은 자들의 일반적인 부활을 의미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해석을 받아들이고 훌륭한 주석가들(할데인, 핫지 등)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의도적으로 부활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부활은 항상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같은 식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의도적으로 부활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단어를 택했습니다. 만일 그가 부활을 말하려고 했다면 다른 곳처럼 부활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예를들면, 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이것은 부활입니다. 생명이 아닙니다. 이 사실로 유대인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말하는 주석을 반박하기에 충분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부활을 의미하지 않는 이유를 살펴봅시다. 첫 번째, 이 해석은 우리 주님 재림 전의 교회의 상태에 대한 신약성경의 설명과 너무나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갑작스럽고 예상하지 못하게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은 서신서들에서도 이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사도는 유대 민족이 구원으로 들어올 때 큰 축복을 마치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 같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신약성경에서 부활은 항상 만물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논증에서 가장 중요하게 지적되는 큰 축복을 위한 기회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의 용어뿐 아니라 재림에 대한 신약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보더라도 맞지 않는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바른 해석은 어떤 것일까요?

셋째,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의 바른 의미

우리가 12절에서 본 해석과 동일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은 과장법이지만 매우 강력한 말입니다. 사도의 논증은 이렇습니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화목이 된 현실이라면,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떠하겠느냐? 그것은 마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같을 것이다.“ 실제로 사도는 유대 민족이 돌아오는 일이 너무나 놀랍고 영광스러워서 우리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 외에 비교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엄청난 축복을 표현하는 바울의 방법입니다. 12절에도 동일하게 표현했습니다.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우리는 지금 부요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이 충만함이 더해지면 우리에게 영광스럽고 놀라움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는 교회가 여기저기서 개인적인 회심이 일어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는 것, 이것은 주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듣는 자유의 계절들입니다- 그것과 부흥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부흥의 때는 사람들의 보편적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전에도 복을 누렸고 기뻐했지만, 부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흥 때의 기쁨은 너무나 압도적이고 엄청나서 마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말과 일치합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고대할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는 영광스러운 소망의 일부입니다. 저는 재림이 아니라 다시 오시기 전에 목격될 수 있는 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확신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영감교리의 놀라운 증거입니다. 거의 2천 년이나 지났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여전히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의 옛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여전히 이 말씀을 믿으며 계속해서 믿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기때문에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믿습니다. 모든 상황이 정반대로 흘러갈지라도 때가 되면 갑작스럽게 일어나고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도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예언에 대해서 조롱을 퍼붓고 파괴적인 비평을 했지만 성경을 굳게 붙잡은 것이 참으로 옳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우시다. 그분은 약속을 절대로 어기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확실하다. 하나님은 오래전에 말씀하셨다. 구약성경의 예언서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예언해 오셨고 결국 행하셨다!“

여러분은 우리가 이 모든 일이 실현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교회도 영광스러움과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비교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회심을 볼 때 우리도 격려받는다는 것을 압니다. 특히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이 회심할때 그렇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목회 중에 겪었던 사례 중에 특징적인 사례를 하나 말씀드리면 아주 방탕하고 추잡스러운 삶을 살았던 한 노인이 회심한 사건입니다. 그는 젊을 때 예수는 사생아라고 욕한 것으로 아주 오랫동안 울며 통곡하고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심령에 깊은 감동을 줍니다. 이 일이 백성 전체에게 일어나 그들이 민족적으로 교회에 들어올 때, 진실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같을 것이라고 사도가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일이 이방인들의 집단회심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들의 회심은 유대 민족의 회심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일어났을 것입니다.

. 결론

교회 안에 있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볼때도 기쁨과 영광과 놀라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에서 지금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이 복음으로 하나씩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계속 듣고 있는데 그 소식도 우리에게 이같은 감동을 준다면 그들이 민족적으로, 집단적으로 돌아올 때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놀라움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다시 영접을 받을 유대인
다시 영접을 받을 유대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