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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1-9 롬11:11-12 유대 민족에 대한 올바른 관점
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1-9 롬11:11-12 유대 민족에 대한 올바른 관점
  • 정원우
  • 승인 2021.12.14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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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 들어가는 말

이 두 구절은 11장을 이해하는데 중요할 뿐 아니라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과 모든 인류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 본론

첫째, 유대 민족에 대한 올바른 관점

하나님과 한 민족으로서 유대인과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배웠습니까? 첫 번째 교훈은 유대인의 상태와 복음에 대한 거부가 예언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언에 대한 전체적인 문제는 중요한 것이며 기독교 메시지와 성경의 영감의 진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여러분도 베드로 후서의 설명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벧후1: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성경적 예언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모든 것은 다 예언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셨고 이 일들이 일어나기 최소한 800년 전에, 어떤 예들은 그보다 더 오래전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제 또 다른 방식인 미래의 유대인을 살펴봅시다. “25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사도는 이 서신을 2천 여 년 전에 썼습니다. 그때도 완전히 소망이 없고 이스라엘도 끝난 것처럼 보일 때였습니다. 그때 사도도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예언을 받아서 이 위대한 예언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것이고, 그들은 회복될 것이다예언이라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은 기적입니다. 진리를 드러내시고 정확하게 기록되도록 감독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활동이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언들의 성취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두 번째, 유대인 보존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것도 현존하는 위대한 기적들 중의 하나입니다. 많은 민족들이 유대인을 말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지만 그들은 전 세계에 흩어지기를 거듭하면서도 지금 다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유일한 설명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구원받고 교회로 인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놀랍게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유대인 개인과 유대 민족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배웁니다. 2차 바티칸 공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순전히 유대 민족의 문제로 바꾸어서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바로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결정때문에 지금까지 수 없는 유대인들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이 이런 끔찍한 결정을 하게 된 것도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만일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된 것이 유대인들을 시기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았다면 절대로 유대인들에게 그런 야만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 이렇게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것도 그들을 시기나게 하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방법에 관한 진리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들과 관련된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신정론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첫 번째,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데 대한 경고입니다. 유대인들의 죄에 대한 자신들의 이전의 관점을 바꾸고 말았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을 유대인들의 주후 70년에 유대인들의 멸망이 하나님께서 완전히 버리셨다는 증거로 결론 지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섭리하고 다스리십니다. 세상에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유대인들의 멸망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파헤치려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시고 간접적으로 역사하십니다. 농부가 씨를 심고 싹이 나고 열매를 맺기까지 많은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일반적으로 그렇게 역사 하십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러한 자연원리에 반하는 직접적인 역사도 일으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위해 이스라엘을 내쫓으신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윌리엄 카우퍼도 저능한 판단력으로 주님을 판단하지 말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통일찬송가 80주 하나님 크신 능력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 하나님 크신 능력 참 신기하도다 바다와 폭풍 가운데 주 운행하시네, 64장의 주제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레스라는 이름의 이교도 정복자를 세우셔서 그를 자신의 백성에게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그리고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이 말씀은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그의 백성을 버리셨지만 완전히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잠시 동안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이 위대한 원리를 깨닫는 것은 극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그 당혹스러움을 자주 표현했던 것입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잊으셨나이까?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나이까?”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 속에 있고, 악한 사람은 더 잘되는 그런 현실에 대한 호소가 많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잘못 되었다쉽게 결론을 내리곤 합니다. 그러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고 계시며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먹구름이 깔렸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한다고 말하지 맙시다. 구름 뒤에 아버지의 얼굴이 있습니다. 절대로 끝을 잊지 마십시오. 윌리엄 카우퍼는 아주 옳았습니다.

 

주님의 목적들은 속히 무르익어,

모든 시간들이 드러날 것이다.

싹은 쓰라린 맛일지 몰라도,

꽃은 아주 달콤할 것이다.

 

눈먼 불신자들은 확실히 살피는데 오류가 있어서

하나님의 일이 헛되다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일의 해석자이시다

그가 모든 일을 분명하게 보이실 것이다.

눈먼 불신이것이 바로 원수입니다. 불신은 항상 눈이 멀었고 앞을 보지 못합니다. 특히 먼 곳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일의 해석자이시다.“ 말한 쿠퍼의 말이 우리를 낙심하게 만드는 대부분의 일에 대한 열쇠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일어나는 일을 깨닫지 못하지만 결국 여러분은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 위에, 그리고 모든 일 뒤에 계시며 하나님은 자신이 행하시는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맙시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여러분의 어리석은 생각을 옳다고 고집하지 맙시다.

세 번째, 이 예언은 지난 교회사에 놀라운 빛을 던져줍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사도바울이 말하는 유대인들을 거부하는 방법으로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종교개혁자들과 초기 개신교도들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태도가 일반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의심 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영국에서 틴데일과 같은 사람들은 농부들도 성경을 암송하기를 기대했는데 학식있는 권위자들이 종교개혁에 대한 반대나 사람들에게 성경을 주는 것에 대한 반대가 그 일들이 더 촉진 한 것입니다. 틴데일과 라티머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읽어 보십시오. 그들은 지하에 숨어 들어가야 했지만 그런 상황으로 그들의 열정이 더 커졌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개혁자들을 박해할 때, 하나님의 섭리로 박해가 멈추었을 때보다, 특히 일반인들에게 복음이 더욱 빠르게 전파되었다는 사실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만일 교회의 박사들이 루터와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온 새로운 가르침을 모두 수용했다면 진리가 그들에게서 멈추었거나 사람들에게 전달되기까지 훨씬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로마 교회의 태도가 돌아가야 할 길을 고속도로 만들었습니다. 바울이 1세기에 하나님께서 행하셨다고 말한 바로 그 일을 하나님께서 다시 행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17세기 청교도 운동과 18세기 영적대각성 운동에도 하나님께서 동일한 행하심이라고 확신합니다. 조지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와 조력자들에 대한 많은 감독들과 성직자들의 태도가 그들이 복음을 들고 현장으로 나가 대중에게 직접 전달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들은 런던의 교회들에서 설교할 권한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케닝톤 커몬과 무어게이트 등의 공동묘지에서 설교해야 했습니다. 공적 교회의 반대가 그들을 대중에게로 몰아낸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이 위대한 복음 설교자들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을 막았기 때문에 현장에 직접 갔고 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었고, 성령충만과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우리는 역사를 되돌아보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모든 것이 현재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방법은 복음 전파와 관련된 법칙일까요? 혹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 방법을 다시 사용하시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을까요? 저는 공적인 교회가 오늘날 대중에게 복음의 가장 큰 장애물이 아닌가 염려합니다. 저는 그렇게 말할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점이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완전히 소망 없는 사람들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듣도록 이러한 방식으로 일하실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시대에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보는 그런 방식으로 그들을 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무지했고 소망이 없었습니다. 오직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고 메시아는 자신들에게만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임이 밝혀졌습니다. 유대인들의 바로 그 거절이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교회로 데려오는데 사용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여기서 교훈을 배웁시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시대와 사도 시대의 유대인들처럼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완전히 외부인으로 생각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편으로 쫓아내시고, 우리의 분명한 잘못을 그 사람들을 복음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는 않으실까요? 제가 보기에는 오늘날 그런 징후들이 보입니다. 만일 복음이 그렇게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오늘날 코로나가 보여준 현실이 그것이 아닙니까? 코로나로 나타난 현실이 단지 교인 숫자입니까? 복음에 대한 관심도 같이 줄어들었다거나 교회만 다닐 뿐 복음에 대한 관심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증거를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들이 기독교를 가장 많이 비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단들의 잘못을 뒤집어쓰는 것에 불과할까요? 오늘날 기독교가 정치인들과 광고의 장이 되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중산층들의 놀이터가 되지는 않았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두 절의 말씀이 말하는 이 위대한 원리로 우리 자신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하셨던 바로 그 일을 지금도 공적 교회에서도 하셔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네 번째, 복음주의 신자들인 우리가 형식적인 신자들과 변절한 교회들에 대한 매우 소중한 가르침을 여기서 배운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물론 오늘날 이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형식적인 교회 구성원들, 혹은 정신은 상실하고 이름만 남았고 진리는 설교하지 않고 진리를 부인하는 변절한 교회입니다.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빠르게 나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자리입니다. 그러면 그런 교회들과 개인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셋째, 우리의 적용

우리는 여기에 대해 세 가지로 답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분리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는 회당과 분리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사도들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유대인부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회당에서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13:46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이제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은 더 이상 동일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전도자들이 이방인에게로 향했고 그 결과 교회는 이방인이 대부분인 이방인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변절한 교회에서 분리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분리되어야 하지만 가장 간절한 바람은 그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일으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떠나지만 마음과 영혼으로 그들을 버려서는 안되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잘못된 사람들에게 쉽게 냉정한 태도를 취하곤 합니다. 그러나 동행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마음문 을 완전히 닫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시기나게 하는 목적을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 참된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지 그들이 알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만일 가족 중에 혼자만 예수를 믿는다면 어떻게 할까요? 아무리 기도해도 듣지 않을 때, 집을 떠나는 것은 극단적 상황이며 최후의 일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지 말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삶을 통해서 보여줄 때, 그들이 갖지 않는 놀라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고 점차 그들도 그것을 갖고 싶어 할 것입니다. 이것이 시기와 질투를 일으킨다는 정확한 의미입니다. 복음은 정죄하고 공격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친절하고 도움을 주고, 필요하면 고난까지도 대신 받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라고 말씀드립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십시오. 그들이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사십시오. 저는 우리들이 이렇게 행하라는 소명을 받았고, 또 변절했다고 생각되는 교회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행하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안에 있는 구원의 열매를 보여줌으로 그들을 시기나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세 번째, 우리가 가진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는 곳에는 절망적인 일도 절망적인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유대 민족보다 더 절망적인 경우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민족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것이라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약속을 압니다. 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이 말씀은 민족들 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적용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매우 심각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이제 그에게 소망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으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이스라엘 민족을 충만함으로 돌아오게 하실 수 있다. 어떤 사람, 어떤 민족, 어떤 개인도 그렇게 하실 수 있읏입니다. 가장 완악하고 고집센 자들이라 할지라도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이방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절망적이었습니까? 신약성경 곳곳에 그들을 묘사하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들어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믿는 자들에게 과거에 음행하고 탐욕하고 토색하고 우상 숭배하고 간음하고 방탕하고 도적질하고 참람하고, 술취하고, 모욕하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하나님에게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지금 보는 두 절에서 크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 교회보다 교회 밖에 저 소망없어 보이는 세상 사람들에게 더 많은 소망이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저 역시 너무 쉽게 결론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해 절망하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난 세월 동안 불경건하고 소망없는 무리들 중에서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시 행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결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21:31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이 일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이루어져 왔고, 지금도 다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 결론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성급하게 결론으로 달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겸손합시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우리는 세상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안에 살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인간의 제도나 조직이나 재능에 의지하지 맙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목적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끝까지 나아가는 성도가 됩시다.

 
 
유대 민족에 대한 올바른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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