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6:10 (토)
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1-8 롬11:11-12 유대인의 실패와 이방인의 부요
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1-8 롬11:11-12 유대인의 실패와 이방인의 부요
  • 정원우
  • 승인 2021.12.13 11: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 들어가는 말

바울과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울 믿었고 또 사도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듯이 민족으로서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은 전체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점을 세 가지 요점으로 살폈습니다. 첫 두 요점은 이스라엘의 거절에 의해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왔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시기나게 하시는데 사용되었음을 살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이유를 본문에서 봅니다.

. 본론

첫째, 유대인의 실패와 이방인의 부요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여기서 그들이스라엘 민족의 대부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넘어지고 실패하였지만 이로인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풍성하게 전해지고 이 사실이 시기를 일으켜 다시 이스라엘 민족이 풍성하게 복음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12절은 복음을 소수만이 받아들였을 뿐인 유대인들의 현재 상태가 이방인들의 축복의 수단이 되었다면, 유대인들의 많은 수가 복음을 믿는다면 그 축복은 엄청나게 클 것이라고 논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여기에 추가하여 이방인들은 이런 염려를 합니다. “만일 유대인의 배제로 우리가 더해졌다면, 유대인들이 교회 안으로 돌아올 때에는 다음에 우리가 쫓겨나지 않을까?” 사도는 절대로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만일 그 일들로 이방인들이 복을 받았다면 유대인들이 충만하게 될 때, 이방인이 받을 복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의 논증방식을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사도는 12절 반절이 이중 논증인데 이것을 반만 설명하고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이 부분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들의 충만그들의 실패와 일치하고 그들의 넘어짐에 대한 답에서 해결됩니다. 이와같이 사도는 가끔 해결을 즉각 주지 않고 부분적으로 문맥을 통해 이해하도록 우리에게 맡겨둡니다.

이제 실패(’diminishing)라는 단어를 살펴봅시다. 찰스 핫지는 이 단어가 영어단어 의미 그대로 숫자적인 축소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세 가지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먼저,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본문포함 딱 두 번 나오는데 고전6:7허물로 번역된 이 단어가 실패, 손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숫자적인 해석은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소수가 아니라 민족 전체의 거부가 이방인들에게 유익이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숫자적 의미는 이 절의 첫 문장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넘어짐이라는 용어가 실패’(diminishing)을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핫지의 설명은 사도가 실패’(diminishing)라는 말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잠시동안 상실했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초라하게 쪼그라든 것이 그들이 복음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설명이 틀렸다고 말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부요함이나 충만함과 연관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들을 생각해 본 후에 다시 다룹니다.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먼저 여기서 세상이방인간의 의미 구별이 없다는 것을 주목합시다. ‘이방인민족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겠지만 어쨌든 이 단어들은 동일한 의미입니다. 중요한 요점은 유대인들의 실패 때문에 복음의 부요함이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 이 점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부요함을 얼마나 실감합니까? 유대인들의 넘어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 무엇인지 실감하십니까? 2:7에서 사도가 말하는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 3:8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을 아십니까? 동일한 주제가 고전6:9-11, 2:11-22, 4:17-20에서도 자세하게 설명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부요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사도는 엡3장 끝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 19 ...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영적 가난뱅이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고 여러분의 이웃들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부요함을 알았다면 여러분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았다면 여러분이 왕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다면, 그들은 시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요함을 소유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의 기도입니다. 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는 이렇게 논증하는 것입니다.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그렇다면 여기서 충만함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찰스 핫지를 비롯한 많은 주석가들이 숫자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실패가 숫자와 무관하듯이 충만함도 숫자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견해에 비추어서 충만함이 다시 나오는 25절을 어떻게 이해할지 궁금합니다.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여기서 핫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의미하는 것은 단정하기 쉽지 않다왜 어렵습니까? 12절에서 한 말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찰스 하지는 25절의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이방인의 대다수로 이해합니다. 유대민족의 회복에 앞서서 이방 세계 대부분이 회심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특별히 숫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저는 12절이 11장 전체의 논증이라고 말씀드립니다. 11장 전체가 숫자의 문제를 다룹니다. 우리는 이미 첫 번째 주요 단락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사도는 유대인들의 배제가 전체적인 배제가 아니라 남은 자들이 많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일을 시작으로 나중에 일어날 일이 25절입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는 전 세계 모든 민족들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말합니다.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사도가 이 단락에서 다루는 사실은 지금은 비록 이스라엘 민족의 매우 적은 소수만이 믿지만, 결국 대부분이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기본전제는 소수만이 복음을 믿고 유대 민족 대부분이 복음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유대 민족의 몰락한 상태가 이방인들을 부요하게 했다면 모두가 들어올 때 이방인들의 부요함은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흠정역 번역가들이 바르게 이해하고 'diminishing'이라고 쓴 것입니다. 그런데 개역한글, 개역개정, 표준새번역, 바른성경 전부 실패라는 애매한 단어를 썼습니다. 그나마 표준새번역은 같은 절에서 이스라엘 전체라는 나름대로 바른 해석을 가미한 번역이 되었습니다.

참되게 믿는 유대인의 수는 소수로 쪼그라들었습니다. 그러나 장래에는 매우 많아질 것이고 이러한 수적 증가와 함께 이방인들이 받을 축복도 더욱 많아질 것이라는 해석에 무리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처음에 유대인이 집단으로 복음을 믿었다면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지는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할례를 끈질기게 주장한 유대인들의 고집을 볼 때 이방인들에게 좋은 소식이 들려지기 전에 기나긴 논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기 때문에 복음이 이방 민족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에는 입장이 달라질 것입니다. 1세기 고대세계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날카롭게 나뉘어서 서로를 미워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한 것이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게하는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민족만큼이나 유대인들도 야만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유대인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을 개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두가 복음을 믿고 이해하게 될때, 이방인들도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모두가 즐거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도가 전혀 다른 두 입장을 상상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는 실패입니다. 그들의 넘어짐과 실패는 진정한 도움이었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펴본 그 방법 그대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며, 우리 중 누구도 편견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교회로 들어오는 것은 여전히 더 큰 부요함과 기쁨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처음에 일어났던 일과 장차 일어나게 될 두 가지 다른 입장을 알아야 합니다.

. 결론

유대인들의 거절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향하는 엑셀레이터가 되었으니 이제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 모두에게 전해지고 다시 유대인들의 충만한 수가 차는 마지막 때가 빨리 일어나기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모든 성도가 됩시다.

 
 
유대인의 실패와 이방인의 부요
유대인의 실패와 이방인의 부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