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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1-7 롬11:11-12 궁극적으로 배제되지 않은 이스라엘
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1-7 롬11:11-12 궁극적으로 배제되지 않은 이스라엘
  • 정원우
  • 승인 2021.12.12 2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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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 들어가는 말

이제 롬11:11-23로 구성된 두 번째 부분을 살펴봅시다. 유대민족은 복음을 불순종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배제되었다는 것은 바울의 논증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1~10절의 첫 번째 단락에서는 전체적인 배제가 아님을 보여주었다면 두 번째 단락에서는 최종적 배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사도의 위대한 예언 하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본론

첫째, 11~32단락의 분석

이 단락의 개요를 살펴봅시다. 이 단락은 세밀하게 구성되었기 때문에 여러 개의 소단락으로 나눕니다. 첫 번째 소단락은 11-12이며 일종의 서론으로 유대인들에게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이방인들과 관련해서 설명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현재 일어나는 일과 그것이 이방인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뿐아니라 먼 미래를 추측하게 됩니다. 이상이 11~12절의 주제입니다. 이곳의 주제는 유대인의 실제 위치이며, 현재와 미래에 교회 안에 있는 이방인들과의 관계입니다. 두 번째 소단락은 13-22절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이방인 신자들이 유대인의 위치와 교회에서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두 가지 중대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멸시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다루는 문제 때문에 유대인들은 대부분의 나라에 의해서 혐오스러운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이방인들은 자신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은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오해였습니다. 두 번째 오해만일 유대인들이 잘못된 행동으로 쫓겨나게 되었는데 이제 그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쫓겨나게 되지 않을지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고려해 볼 필요가 있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락에서 그 대답을 봅니다. 이 두 가지 난제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는 사도의 논증 단계들을 알기 위해 이 단락을 더 자세하게 나누겠습니다. 먼저, 13-14절은 자신의 개인적인 관점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 논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15절에서 다시 한번 언급합니다. 다음에 16-17에서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근본적인 관계와 관련된 중요한 진술을 말합니다. 그리고 18~21절에서 이방인들에게 이 관계를 오해하지 말라는 이방인에 대한 특별한 경고가 나옵니다. 특별히 사도는 너무 자극하여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마지막으로 22절에서 전체 내용을 요약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세 번째 소단락으로 인도합니다. 세 번째 소단락은 23-24절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회복의 가능성과 타당성을 말합니다. 다음에 25-32절 마지막 소단락에서 놀라운 진술을 합니다. 미래에 유대인들이 회복되어 교회 안에서 복음의 축복에 참여할 것을 예언합니다. 유대인들의 회복은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날 때와 방법과, 이유까지 알려줍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개념을 명심하고 11-12절의 첫번째 소단락을 시작하겠습니다.

둘째, 궁극적으로 배제하지 않은 이스라엘

첫 번째 소단락 11-12에서 사도는 전체 주제를 제시합니다. 11장 시작과 동일하게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라는 말과 함께 부정적인 질문이 이어지고 대답 또한 부정적입니다. 우리는 11절을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느냐?” 이 질문에 대해 가능한 유일한 답변은 1절과 같은 강한 부정의 대답입니다. 그러면 이 질문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열쇠는 실족하다(stumble)''넘어지다(fall)' 두 단어의 의미 차이에 있습니다. 사도는 이미 9장 끝에서 부딛히다라는 개념을 소개하였습니다.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벧전2:7-8절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에서 걸려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행위와 그들이 이해하는 방식대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과, 그로 인해 그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을 계속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설교된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사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의롭다함을 받기 때문에 그를 믿으라고 했지만 그들은 이 복음을 믿지 못하고 걸려 넘어졌습니다.

이와같이 실족하다라는 단어는 첫 번째로 중요한 단어이며 그것 자체로 설명이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실족을 회복 불가능한 넘어짐으로 생각하지만, 사도는 그것이 실족하는 것실제로 넘어지는 것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혹은 단순한 넘어짐이 아니라 최종적이고 완전한 넘어짐과 구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민족의 버림이 최종적인지 묻고 즉시 답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11장 전체의 요점입니다. 첫 번째 큰 단락에서 모든 유대인들이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 다음 유대민족 전체가 최종적으로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입증하고 설명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유대인이 최종적으로,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면, 넘어진 것(fall)이 아니라 단지 실족한(stumble)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소단락(11-12) 마지막 부분에서 세 가지로 답합니다. 유대인에게 일어난 일은, 첫째로,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목적의 한 부분이며, 둘째로는 유대인을 위한 것이고, 셋째로, 궁극적으로는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복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 가지 대답을 각각 살펴봅시다.

왜 유대인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첫 번째,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다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이방인 신자인 이유를 설명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유대인의 이야기만 있고 이방인에 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구원의 축복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사도는 유대인의 실족함이 이방인들이 들오게 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먼저 용어들을 살펴봅시다. “그들의 넘어짐으로... 하물며여기에서 넘어짐 fall'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fall)까지 실족(stmble)하였느냐"에서 이미 다르게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의 번역은 정확하지만 이번에는 죄를 범하다‘, ’위법하다입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죄를 범함으로(혹은 위법함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이렇게 해야 합니다. 사도가 사용한 단어는 잘못된 걸음‘, ’범죄‘(때로는 표적을 벗어남‘)를 뜻합니다. 그래서 넘어짐이 아니라 범죄(혹은 위법)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들의 죄악된 행동의 결과를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약성경에 자주 사용되었는데 구약에서 자주 예언된 것입니다. 49:4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5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6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목적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21:42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그리고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이어서 예언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하던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도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15:24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사마리아 여인에게는 4:22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그런데 예수님은 공생애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유대인의 거절과 십자가의 죽음의 결과로 유대인들이 밀려난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유대 민족이 메시아를 거절할 것을 아셨습니다. 오순절날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그날에 성령이 강림함으로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의 거절이 이방인에게 기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행8장에서 스데반의 죽음을 시작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아 사방으로 흩어져서 복음이 유다와 사마리아까지 선포된 것입니다. 13:45-46에서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의 극심한 반대는 사도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원인이 바로 유대인의 반대였습니다. 28:28에 로마에서 유대인들에게 같은 말을 했습니다. 살전2:14-16에도 같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같이 사도들이 이방인으로 향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계속되는 거절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들이 사도가 말한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도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큰 고통이었습니다. 당연히 불신자들은 분노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문제에 대해 바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주신 환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설교하라고 명령하셨지만 바울도 아라비아에서 그러한 영적갈등을 겪어야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건들로 말이암아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주목할 사건이 있습니다. 15장에 예루살렘 공회가 열렸습니다. 주제는 복음을 믿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 여러 해 동안 일으킨 갈등을 해결하는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믿고 할례도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갈라디아서가 할례를 요구하는 유대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처음부터 유대인들은 이방인 복음화에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총회, 갈라디아서 모두 유대주의자들에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방인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는 교리가 영원히 확립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실족함을 하나님께서 이방인 구원을 촉진하는데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첫 번째 대답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믿도록 이 실족을 허용하셨을 뿐 아니라 심판에 의한 완악함을 유대인에게 가하셨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에 두 번째로 매우 특별한 말씀이 나옵니다. 11절에서 사도는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일종의 을 봅니다.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절은 복음이 이방인들로 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복음의 결과를 본 유대인들은 시기하였고, 그로인해 이미 거절했던 복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두 번째의 중대한 교훈이 있습니다. ‘시기나게 하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14절에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말이 바뀌었지만 시기를 부정적 의미로만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가 쉽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생각을 갖게합니다. 먼저 시기로 시작하여 경쟁심으로 끝납니다. 이방인들이 얻은 축복을 볼 때, 유대인들은 왜 우리는 이 축복을 얻지 못할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계속 심사숙고 함으로 결국 그들도 이 축복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는 개인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유대 민족 전체에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요점입니다. 사도는 지금 당장 이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이방인의 축복을 보며 시기가 나고 그 시기로 인해 그날이 돌아올 것이라는 중대한 사상을 소개합니다. 그렇게 이 완성됩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했고 그리하여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전달되었고,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 받는 복음의 축복을 보게 될 때, 결국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실족함이 일어난 세 번째 대답입니다. 궁극적으로 유대인들의 실족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으로, 축복으로 그리고 교회 안으로 다시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약하며 확인해 봅시다. 이 두 구절에서 사도는 자신의 전체 주제를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넘어진 것이 아니라 실족한 것입니다. 먼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기 위함이요, 다음으로 복음의 축복으로 부요해진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자극하여 시기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미래의 어떤 시점에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거절했던 복음을 믿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결론

`유대인의 넘어짐이 아니라 실족함으로 이방인에까지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찬양하는 성도가 됩시다.

 
 
궁극적으로 배제되지 않은 이스라엘
궁극적으로 배제되지 않은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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