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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1-6 롬11:7-10 저주의 시편들
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1-6 롬11:7-10 저주의 시편들
  • 정원우
  • 승인 2021.12.12 2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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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10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 들어가는 말

우리는 이 말씀들을 해석해 가면서 여기에 네 가지 중요한 원리가 있다는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이 원리들은 사도가 전개하는 특별한 논증과 관련된 것일 뿐 아니라 오늘날 교회의 상태와도 관계가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는 유대인들 대다수가 교회 밖에 있고 복음을 거절하고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전체적으로 거절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논증을 제시한 다음에 7절에 그런즉 어떠하냐라는 말과 함께 이 논증을 요약합니다.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그리고 성경을 인용하여 모든 논증을 증명합니다. 첫 번째 교훈은 바른 방법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을 주셨다는 말씀에서 표현되었듯이 그들이 심판에 의해 눈멀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각각 저주와 메시아의 시편을 이해하는 방법들에 대한 교훈으로 시69편의 인용에 나오며 이 시편은 저주의 시편으로 불립니다. 오늘은 저주의 시편에 대해 나누겠습니다.

. 본론

첫째, 저주의 시편들

저주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는 간절한 열망입니다. 시편에는 그런 시편들이 여러 편 있습니다. 예를 들면, 58, 69, 109, 137편 등입니다. 우리는 시편 69편을 연구합니다. 저주의 요소가 사람들에게 큰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 시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불신자들이 이 시편으로 인해 성경을 반대합니다. 또 반대하지는 않지만 확신을 갖지 못하고 고민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그 점을 악용하여 믿음을 흔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시편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악인의 불친절과 악행을 하나님께서 폭력적인 방법으로 처벌해 달라는 잔인한 표현이며, 개인적인 복수의 열망이라는 죄악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항상 이 말이 따라다닙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얼마나 다른가그런데 이런 비평을 하는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예수라고 부른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성과 속죄의 사역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런 말씀을 단순히 예수의 가르침과 사랑과 비교합니다.

여기에 접근하는 방법은 먼저, 시편69과 이와 관련한 주장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교회사 초기에 말시온이라는 이단은 구약성경 전체를 부정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신약성경에 구약성경을 첨부한 것은 교회의 실수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구약성경이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다윗과 같은 사람들의 역사를 읽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어린아이들이 이런 내용이 담긴 구약을 읽으라고 하는 것은 기상천외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시69편 같은 복수심이 가득한 시편은 절대로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구약성경의 관점은 기독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제기되는 것은 영감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비평가들은 성경의 영감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브라우닝도 영감을 받았고, 워즈워드도 영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영감이 시인이나 예술가의 영감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의미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딤후3:16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또 성경을 기록한 모든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 거듭났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벧후1:20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1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세 번째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구약성경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권위에 대한 의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창세기의 문제는 순수 과학의 문제이기 때문에 기독교와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많은 교단들이 진화론을 인정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고신에도 진화를 인정하는 교수들이 목사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문제는 곧 우리 주님에 대한 문제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합니다. 네 번째 문제는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됩니다. 왜냐하면 처벌은 하나님과 구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비평가들은 하나님도 구약성경도 다 믿지 않습니다. 그 비평가들중 하나가 바로 미국의 어떤 교회의 감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난폭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대형교회 설교자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둘째, 저주 시편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

우리는 이런 주장들에 대해 어떻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가장 낮은 수준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다윗의 시편을 먼저 봅시다. 다윗은 69에서 그는 그들이 나를 괴롭힙니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기도가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 위에 임하기를 구하는 편견과 복수심에 불타는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흥미롭게도 사실은 우리가 이런 말씀들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성경을 잘 배우는 방법입니다. 이 말을 기록한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대답은 누구보다 가장 복수심이 적은 사람들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확인해 봅시다. 먼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지속적으로 시도했다는 것을 압니다. 다윗은 그런 사울을 죽일 기회가 계속 있었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라며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해하며 그를 죽인자를 처벌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보다 더 한 것은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역입니다. 그는 다윗을 죽이려 했고 왕국을 빼앗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암살롬에게 복수심을 조금도 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장군들을 보내면서 장군들에게 그 소년에게 아무짓도 하지 말라, 그를 해치지 말고 용서해 주어라장군들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이 전쟁 중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또 압살롬을 피해 달아나던 중에 바후림에 이르렀을때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피흘린 죄를 처벌하시는 것이라고 하며 계속 저주하였습니다. 그때 신하들은 시므이를 죽이자고 하였지만 다윗은 지금 이 상황을 만드신 것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뜻이라며 저주하도록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하16: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다른 모든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요압과 그의 형제들 때문에 고민했던 사건일 것입니다. 삼하3:39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다윗에 대항해서 싸웠던 아마샤가 뉘우쳤을때 다윗은 그를 용서해 주었고 격려까지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요압과 그의 형제들은 그를 죽였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다윗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윗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복수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시편69을 다윗의 복수심으로 이해하면 전체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다윗은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두 번째, 영감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1:16의 베드로의 인용에서 완벽한 대답을 봅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 그러므로 그 말씀들은 성령의 말씀들이기 때문에 단지 다윗의 진술일 뿐이라고 빼버릴 수 없습니다. 다윗도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는 시편을 쓸 만큼 재능있을 뿐 아니라 성령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증언같은 이런 증언들을 주의깊게 살펴야 합니다. 세 번째, 구약성경을 완전히 인정하시는 우리 주님의 태도입니다. 우리 주님은 구약성경을 빈번하고 명확하게 인용하셨습니다. 10:35에서 예수님은 시편을 율법의 한 부분이라고 하시면서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을 표현하는 여러가지 용어가 있지만 구약성경 전체를 종종 율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도 구약성경 전체를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앞에서 말씀드린 창세기 창조 기사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예수님이 지금 우리가 가진 지식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과학적인 오류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런 문제들에도 오류가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인격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구약성경을 대하는 주님의 태도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구약성경 전체가 절대로 폐하지 못하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주의 시편을 절대로 개인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윗은 개인적인 복수심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다윗의 개인적인 복수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행하시는 심판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마지막에 대한 심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열심이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말이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법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주 해야하는 중요한 구분입니다. 설교자는 이 구분을 자주 해야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과 경건한 사람이 하나님의 대적들에 대해 느끼는 것은 절대로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며 하나님과의 공감과 관련됩니다. 이런 예는 끝이 없습니다. 그림처럼 분명한 예가 시104편 마지막에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연의 놀라운 조화, 모든 것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복잡하게 배열되어있는지 자연과 창조를 놀랍게 묘사하며 마지막에 갑작스러운 감탄이 터져나옵니다. ”35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왜 시편 기자는 사악한 자에 대해 말할까요? 그것은 자연에는 다양성과 조화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이 부조화와 고통과 불행의 요인을 불러왔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한탄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이 말은 개인적인 말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완전하심을 볼 줄 아는 사람의 말입니다. 그는 세상에 악이 사라지고 조화와 완전함, 하나님의 영광만이 우리를 다스릴 그때를 바라보고 심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69편의 주제입니다.

다섯 번째, 가장 중요한 예언의 요소입니다. 사도는 자신에 대해 쓴 것도 아니며, 자기 시대 이상의 것을 썼습니다. 을 말합니다. 신적 영감을 가지고 오시기로 되어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예수님을 거절하는 세계를 특히 그를 없애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외치고, 야유를 퍼붓는 유대인들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 권위자들은 이 본문을 미래시제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9 ... 그들의 밥상이 ... 될 것이며, 10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할 것이고..“ 다윗은 민족의 미래를 보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처벌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극히 어렵습니다. 어렵다는 말은 성경의 영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계시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 외에는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은 하나님의 사랑과 양립할 수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거부합니다. 처벌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처벌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보편구원론자들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심지어 마귀까지도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처벌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처벌을 빼면 꺼낼 게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수많은 것을 주었지만 불순종하면 벌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내용을 문제삼을 필요도 없습니다. 137:9에는 어린이들의 죽음을 바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놀랄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죽게 되었고 멸망 받는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우리는 모두 잠깐 보이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어릴때 죽는 것은 끔찍하고 백수를 훌쩍넘기고 죽어 지옥가는 것은 끔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실제적인 단어들이 나오는 이유는 구약시대에는 축복도 주로 물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주도 실제적인 사건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신약시대는 성령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보편적으로 임했습니다. 그래서 축복도 영적인 것입니다. 시대마다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니 계시의 방법도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하나입니다. 물론 구약시대의 삶은 지금보다 폭력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은 보다 선한 삶을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자폭탄 시대에는 다윗 같은 사람들을 비평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실 오늘날 법으로 규제되어서 그렇지 실제로 야만적인 기사들이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까? 9: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살후1: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이런 가르침은 복음서나 서신서 뿐아니라 계시록에도 무수히 등장합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 구약성경의 영감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의 영감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들은 참으로 불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욥도 처음에 이것을 알지 못했던 시절에는 하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누구든지 이 진리를 알면 자신의 손으로 입을 가릴 것입니다. 말을 멈출 것입니다. 우리는 높으신 하나님, 내가 다루지 못하는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이제 처벌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갈보리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왜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해야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이 아들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그렇게 고뇌로 부르짖어야 했습니까? 어떤 인간도 그분과 같은 고난을 당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분이 시편 69편과 22편에서 예언한 고단을 당해야 했습니까?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여러분은 이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대답은 오직 한가지 뿐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이 일을 요구합니다.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할 다른 방법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성자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사도는 로마서 첫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궁극적인 증거는 갈보리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의 죽으심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큰 증거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의 가장 큰 증거입니다.

. 결론

만일 여러분이 죄에 임한, 그리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진정으로 십자가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다윗은 성령의 계시와 영감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어렴풋이 느꼈던 것입니다. 죄를 범한 모든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적절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바램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셔서 저주의 시편을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의지하고 그 말씀따라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

 
 
저주의 시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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