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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1-5 롬11:7-10 심판에 의한 눈멈
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1-5 롬11:7-10 심판에 의한 눈멈
  • 정원우
  • 승인 2021.12.09 16: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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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10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 들어가는 말

오늘 시작하는 부분도 우리에게 심오한 교훈을 줍니다. 가장 먼저 잘못 구하는 것의 엄청난 위험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구했고 얻지도 못했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비극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붙잡아야 할 중요한 교훈도 동일합니다. 그가 인생의 시작에 있든지 끄트머리에 있든지 여전히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 양육, 배경, 혹은 어떤 것이라도 의지하는 순간 바른 자리에서 이미 이탈했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잘 못 구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심판에 의해 눈이 멀었다는 것, 세 번째와 네 번째는 각각 저주와 메시아의 시편을 이해하는 방법들에 대한 교훈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두 번째 교훈을 계속 나누겠습니다.

. 본론

첫째, ’심판의 눈멈(우둔함)‘에 대한 것입니다.

7절 끝에 “ ...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이하 구절에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개역한글에서는 완악하여졌느니라로 되어있는데 로이드존스 목사님 책들이 다 오래전에 번역해서 개역한글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강해집도 완악하여졌느니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런데 개역개정판은 우둔으로 바뀌어서 KJV눈멀어졌다과 거의 일치합니다. 참고로 NIV성경은 개역한글처럼 완악해졌다로 되어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가 바로 그들이 눈멀어졌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도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을 주셨다했습니다. 이제 두렵고 떠림으로 대할 가장 어려운 교리를 배웁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없었다면 절대로 다루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떤 교리입니까? 이 교리는 9:15이하에서 이미 언급된 것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사람이 완악해지면 자기 허물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반론하는 자들에게 이런 대답만 있는 것입니다.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하나님과 논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늘에 속하고 여러분은 땅에 속한 자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권한과 능력이 있으십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사도바울만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고등비평가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바울의 가르침을 거짓되이 비교합니다. 예수는 순전한 사랑을 가르치지만 바울은 바리새파 출신으로 율법주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3:13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이 말씀이 사도의 말과 동일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백성들이 완악하여졌다했고, 사도는 혼미한 심령을 주셨다했습니다. 주님은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고, 사도는 신적인 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신적인 면이 행28:15절과 요12:37절에서도 발견됩니다. 사도가 인용구절을 해석하면서 강조점은 하나님은 어떻게 이것을 행하시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방법은 반역하는 자들과 함께하기를 멈추신다는 것입니다. 6: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한 권고를 거역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 않으십니다.

두 번째 방법은 롬1:19절부터 끝절까지에서 묘사됩니다. “그들을 버리셨다, 계속해서 짓는 죄의 권세에 넘겨주셨다라는 진술이 세 번 반복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을 완전히 버리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은총을 주셔서 죄의 영향과 효력이 제한되게 하셨습니다. 일반은총이란, 자연뿐 아니라 가정, 법률, 예술, 음악등 정치 문화 사회 전반적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악의 효과가 제한되도록 주신 것들입니다. 그런 것이 없었다면 세상은 벌써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억제책을 거두실 때가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과 바벨론에서 무서운 고통의 세월을 지낸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억제책을 거두시는데도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실제로 완악하게 되는 절차입니다. 9장에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행하신 역사입니다. 바로가 계속 거부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완악하게되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본래보다 더 완악하게 만드심으로 악한 행동 외에는 다른 행동을 할 수 없게 만드신 것입니다. 사도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중요한 교훈을 주시기 위해 바로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심판에 의한 눈멈의 상태를 일으키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러한 상태의 백성들이 믿는데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심판에 의한 눈멈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8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13장에서 제자들에게 비유의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그들은 알도록 예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부과된 심판에 의한 눈멈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단지 처벌에 불과할까요? 하나님께서 완고한 사람들에게 취하는 행동일까요? 물론 주로 처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빛을 거절하면 그 자체로 완악함과 강퍅함을 만듭니다. 우리도 어떤 일을 처음 할 때는 주저하다가 점차 아무렇지 않게 되듯이 사람이 걍퍅 해지는 과정도 동일합니다. 성령의 역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의 빛에 불순종하면 서서히 완악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3: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벧전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바로의 기사에서 완벽하게 제시됩니다. 바로는 계속 더 걍퍅해 졌고 계속 더 사나워졌습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반항 가운데 거의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심판은 주로 처벌의 역할을 하지만 그 이상이 있습니다. 벧전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심으로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넘어지도록 정해졌습니다. 4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여기서는 사도바울처럼 미리 기록된 자라고 했습니다 두 말씀 모두 불순종하고 넘어지도록 정해진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우리는 먼저 하나님은 죄를 창조하지 셨음을 단언합니다. 요일1:5 ”...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죄를 짓게 하지 않으십니다. 1:13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대답은 이렇습니다. 로마서 세 장에서 풍성하게 살핀 것처럼 누구든지 하나님만 구원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 외에는 누구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 행위로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증거는 아니며 아직 구원에 대해 무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자신이 구원에 사람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택하셨을 때,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사실이 위의 두 말씀들을 설명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정죄 받기로 정해진 것은 그들이 구원받기로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는 택함받은 사람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반항하고 불순종하고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와 같은 포악함뿐 아니라 매우 점잖은 태도로, 예의 바르게 이런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를 아십니다. 그래서 바로를 불신앙의 본성에 대한 무서운 예로 바로를 일으키시고 바로의 본래 불신와 불순종을 증가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본성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본성을 이끌어 내시고, 바로의 격렬한 반응을 통해서 더 분명하게 나타나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는 이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을 주셔서 그들은 완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잇따라 보내신 선지자들을 계속 죽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을 때도 같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혼미한 심령을 주셔서 불신이라는 무서운 상태에 빠지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기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죄는 이미 그곳에 있습니다. 그 죄는 전적으로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심판에 의한 완악함의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그 완악함을 확대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죄와 불신앙의 상태를 전 인류에게 분명하고 명백하게 나타내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이 구약성경에서 인용된 구절들에 대한 유일한 설명입니다. 그리고 주님도, 사도행전에서 누가도, 유다도, 바울도, 베드로도 그 이유로 구약성경을 인용한 유일한 이유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그들을 죄인으로 만드시는 것이아닙니다.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시기로 결정하시고, 동시에 이들을 통해 죄의 악독성, 죄의 무서운 특성, 그리고 긍극적으로 죄가 어떻게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게 만들고, 섬기지 못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게 만드는지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진리는 오늘날 우리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 시점에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알려주기 원하는 몇 가지 실제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셋째, 우리가 받을 실제적인 교훈

첫 번째, 이 말씀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8-900만 기독교인이라고 실제로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사람은 그중에 절반은 될까요? 이 나라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이 성경입니다. 우리나라에 성경을 소유한 가정이 최소한 30-40%는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전국적으로 대형 체육관에서 대규모 집회들이 종종 열렸습니다. 그러면 한꺼번에 수만 명씩 말씀을 들었습니다. 또 온 나라 교회들이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교회에 데려와서 말씀을 듣게 하려고 재정과 인력을 다 들여서 수시로 사람들을 교회에 데려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바로 다윗이 우리에게 해답을 주는 것입니다. ”9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옵소서이 나라의 종교적인 상황이 풍요’, ‘밥상이라는 말로 설명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우리나라 밥상이 그렇게 좋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돈이 많아서 자동차로 직접 주말마다 여기저기 여행 다니기에 바쁩니다. 엄청난 술을 마십니다. 돈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옵소서하나님의 축복이 바로 저주가 되고 있습니다. 가난은 무서운 거입니다. 하지만 풍요는 영적인 의미에서 더욱 위험한 것입니다. 전쟁의 폐허 더미 위에서 불과 70년 만에 선진국의 지위까지 부여받게 된 우리나라가 이러한 의미에서 더욱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밥상이 올무로 바뀐 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이 시대가 그렇습니다. 여러 나라들이 심판에 의한 완악함의 과정 아래 있다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은 때때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 민족에게 무엇이 문제일까?“, ”도대체 그들은 왜 이 문제를 보지 못하는가?“ 여러분은 이 질문에 답변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 외에는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저는 두 번째, 두려운 마음으로 말씀드리면,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는 편이 낫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복음을 전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더 이상 진리를 말하지 않겠다고, 말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이제 그쳐야 합니다. 더 계속하면 오히려 우리를 광신자로 몰아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이 그들을 격노하게 하고 흥분시키고, 더 고집하고 반항할 때 여러분은 그들을 전도하기를 그만둘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조용히 기도를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 교훈은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되는 교훈입니다. 부흥에 관한 교훈입니다. 찰스 피니같은 사람이 여기에 대한 답을 줍니다. 찰스 피니는 유명한 부흥강사였습니다. 그는 매우 놀라운 회심을 했고 회심한 다음날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훌륭하고 현명하고 매우 재능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잘못된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찰스 피니는 그의 책 부흥에 대한 강의에서 여러분들 중 누구라도 부흥을 원한다면 부흥을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어떤 조건을 실천하기만 하면 부흥은 자동으로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피니가 주장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그는 목사들에게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부흥은 반드시 일어납니다그러나 제 대답은 한가지 뿐입니다. 그런 부흥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피니 또한 큰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를 통해서 일어난 부흥이 전부 가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그 부흥의 이유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했지만 부흥을 얻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부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여러 해 동안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고, 설교하면서, 성도들에게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고 강권해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왜 부흥이 오지 않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변은 우리가 심판에 대한 완악함의 단계를 통과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개혁주의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해 있고 부흥을 진정으로 바라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처벌, 억제, 축복의 철회인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개인적인 축복들을 주심을 감사합시다. 하나님은 개개의 교회를 축복하실 수 있으며 실제로 개개의 교회들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부흥을 보지 못했고 그런 부흥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부흥이다라고 자신의 교회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곳에는 부흥을 주시고 한 곳에서 철회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교회만 아니라 공동체적 개념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부흥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 이 시기가 끝나고 부흥이 다시 올지 모릅니다. 과거 부흥의 역사를 읽어보면 심판에 의한 완악함과 강퍅함의 시대 끝에 종종 부흥이 임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을 위해 항상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그러나 부흥이 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이 교리에 의해 위로를 받습니다. 만일 제가 부흥이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면 저는 밤에 편히 잠자리에 들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밤낮없이 뭔가 해야 하고 사람들에게 권고하고 다녀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밤낮없이 일해도 부흥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흥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강퍅하게도 하시고 부드럽게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충만하게도 하시고 성경을 거두어 가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에 굴복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부흥을 항상 주도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언제나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일을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복음을 계속 전해야 하고 우리에게 자비를 내려주시기를 하나님께 계속 간청해야 합니다.

. 결론

그렇습니다. 이것이 항상 우리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이 일을 계속하십시오. 그러면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비를 간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기를 구하는 것뿐입니다.

 

심판에 의한 눈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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