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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0-35 롬10:18-21 하나님의 실수 없는 목적
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0-35 롬10:18-21 하나님의 실수 없는 목적
  • 정원우
  • 승인 2021.11.30 1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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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 들어가는 말

이제 유대인들에 대한 사실이 결정적이며 핑계 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인간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비극적인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복음을 거절하였고, 이제 백성이 아니며 어리석고 무지한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고 기독교 교회 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 본론

첫째, 우리가 배워야 할 영적 교훈들

성경 여러 곳에서 이 말씀을 듣습니다. 고전10:11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구약은 역사적 기록일 뿐 아니라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이점은 신약도 동일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지 못한다면 유대인들의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 됩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졌지만 자신들에게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외적인 조건들에 만족하였고 성경이 자신들과 자신들이 처한 상태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그들을 책망하고 정죄하고 있었지만 조금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비참을 피하기 위해 사도가 말하는 데서 우리 자신을 위한 교훈을 발견해야 합니다.

첫 번째, 성경의 통일성입니다. 통일성은 우리가 아주 분명하게 배우게 되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사도가 신약의 원리를 세우기 위해 구약성경 구절들을 인용하는 빈도에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유일한 이유가 있습니다. 신약시대처럼 구약시대에도 작동원리가 동일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한데 묶어서 성경을 구성하도록 인도하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세우시기 전에 영원하신 목적을 이미 세우셨고 아담과 하와때부터 시작해오셨습니다. 결국 롬9장과 10장까지의 발전을 보는 것입니다. 3:7처럼 믿음의 자손인 우리는 다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하나님은 오직 한가지 구원의 계획만 가지고 계십니다. 행위나, 국적이나, 출생과 가정교육, 어느것도 포함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방법뿐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서 영원히 확증합니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에 구원의 방식은 동일합니다. 그런데 구약 아래나 신약 아래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원리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구약을 인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도 사울처럼 행7장의 연설에서 그 점을 지적합니다. “너희 조상들이 했던 바로 그것을 행하고 있다주님도 사역의 마지막에 바리새인들을 혹평하신 데서 똑같은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23:32 너희는 조상의 분량을 채우고 있다.” 바로 거짓 선지자들과 다른 자들이 여러 세기 동안 해왔던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항상 명심해야합니다. 곧 성경은 하나이며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이 창세기 시작부터 계시록 끝까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가 배워온 분명한 교훈이 있습니다.

두 번째, 적용해야 하는 교훈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정확한 본문을 찾고, 장과 절, 문맥, 요점을 함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견해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구원에 대해서 그리고 믿음과 불신앙에 대한 전반적인 질문과 관련해서 사도가 가르치는 원리는 교회와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재연되고 있다는 것이며 이점을 거듭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시대, 나이, 지역을 초월하여 하나님이 다루시는 방식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 원리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영적 교훈들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 복음의 진리에 대한 반대는 항상 전통에 의지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유대인들에 대해 제기하는 고발은 그들이 가진 것들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전통, 국적, 성경을 소유함, 예언자들, 등등.. 두 번째, 그들의 행위를 의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에 자신들을 복종하지 않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은혜의 선물로서 주신 구원을 거절하고 자기 공적, 자기 행위로 구원을 얻기를 열망했습니다. 이것이 여기서 내세우는 원리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한 것을 너희도 똑같이 하고 있다이제 이것이 지난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어 왔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전통과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믿음은 언제나 기독교 복음의 가장 큰 적수들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수많은 예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순조롭게 출발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잘못을 보았고 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믿었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였고 그들 속에 교만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계속되는 하나님의 목적

4세기 초에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상황이 변했습니다. 거대한 로마교회는 로마 제국과 혼합되었고 신약의 교회와 완전히 이질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중세 로마 카톨릭은 신약시대의 교회와는 정확하게 반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사도가 말하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에 의해 되살아나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으로 돌아갔고 로마교회의 가르침이 전부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과 각성을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곧 큰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 때의 유대인들과 똑같이 교회가 강퍅하게 된 것입니다. 중세시대에도 유대인들처럼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종교적이었고 선지자들의 교훈을 알았지만 똑같은 핍박이 일어난 것입니다.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을 핍박하고 사형에 처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보나롤라, 북이탈리아의 왈도파, 영국의 위클리프(부관참시), 유럽대륙의 존 후스 등이 핍박을 받고 사형에 처해 졌습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알아보고 그의 설교를 듣고 수없이 모여들었지만, 로마교회 당국자들은 설교를 금지하고 결국 목숨까지 빼앗은 것입니다. 종교개혁시대에도 바울이 말한 것이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루터가 성령을 통해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를 깨닫게 되었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3:28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사도바울과 여러 설교자들이 전했던 그 설교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는 세상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그들의 설교를 반대했습니다. 프랑스의 존 칼빈도 개혁적인 내용이 문제가 되어 스위스 바젤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런던의 스미스필드 수산물 시장에서 순교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핍박을 피해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아메리카로 떠났던 청교도들도 교회에 의해 핍박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200여 년 전 칼빈주의 감리교도였던 휫필드나, 알미니안파 웨슬레 형제에게 속한 사람들이 전부 교회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와같이 핍박을 환영해야 할 교회가 전통과 형식에 굳어서 핍박을 일으킨 것입니다. 또한 교회가 영적으로 잠들어 있을 때도 똑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부흥은 대도시, 인물들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시골에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에게 총명과 능력을 부으셔서 설교하였고 교회가 생명을 받고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시대마다 일어났던 부흥의 역사는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하나님은 종일 이스라엘에 사랑을 베푸셨지만 끝내 불순종 했을때 유대인들이 들어오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부흥의 역사는 새로운 단체가 생겨난 것을 보여줍니다. 마틴루터는 로마교회를 떠날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로마교회가 진리를 거부하고 루터를 추방하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16세기에는 영국 국교회가 완고하게 되어서 1662년 대 추방령을 내려서 2000여 명의 청교도 성직자들이 쫓겨나서 회중교회와 다른 교회들이 설립되었습니다. 18세기에는 휘필드나 웨슬레를 따르던 사람들이 영국 국교회에서 쫓겨났고 새로운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한쪽은 칼빈주의를 따르는자들, 다른 한쪽은 알미니안 주의를 따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20세기 초에는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서 온갖 외세의 핍박과 환난을 받던 조그만 나라에서 1905년 원산, 1907년 평양의 두 번의 부흥 운동을 통해서 온 나라가 달라졌습니다. 당시 부흥 운동이 부산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불과 5년도 못 되어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부흥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고신을 세운 사람들이 평양에서 부흥을 경험했던 분들이었고 부산에서 고신에 의해서 시작된 주일학교 운동이 한국전쟁을 기점을 전국으로 퍼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부흥의 영향이 부산에도 뚜렷이 나타난 것입니다. ‘동방의 등불이라 불릴 정도로 미미한 존재였던 대한민국이 이제 열 손가락에 꼽히는 나라가 된 것도 부흥의 결과였습니다. 10장에서 가르치는 영적원리가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모든 곳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절대로 초대교회에 국한된 일이라고 선을 그어서는 안됩니다. 그 일은 초대 교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일어났고 계속 일어나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과 형식 사이에 이러한 갈등이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심령이 굳어지고 형식적이고 고착화 되고 끝내 영적으로 죽어버리는 그런 일은 항상 있었습니다. 그때는 진리가 오면 교회는 진리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이 구절들이 오늘날 세대에 무엇을 말해줍니까? 저는 오늘날 고신을 비롯한 개혁주의 교회들을 볼 때, 이단들을 비판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옳다는 증거로 삼으려 하고 있지 않은지 심히 두렵습니다. 굳어지고 있는 현실을 끝내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어느 이단보다 큰 이단인 WCC가 한국의 교회들을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카톨릭이 진리 더하기 전통으로 이단이 되었는데 이제 WCC는 진리를 빼버리고 거기에 전통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리를 설교하지 않은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자 우리 설교가 너무 유별나지 않도록 합시다. 너무 복음적이 되지 맙시다. 이제 전 세계 교회가 하나가 되는 데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슬람을 이기고 기독교의 적들을 힘을 합쳐야 이기고 세계 복음화를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현대세계의 특징이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조직과 형식을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선행으로 그리스도인을 만들지 은혜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대속형벌 교리는 조롱받고 있으며 그 자리를 그리스도를 본받자는 운동이 대신 차지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한 이 요점들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핍박은 예전보다 더 교묘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형대로 가는 일은 절대로 없지만 바른 교리를 무시하고 억압하는 방식으로 핍박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일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사이에도 진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진리를 내려놓고 애매한 신앙,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나 되자는 헛된 구호만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진리를 지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정통적이라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합니다.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정말 사람들이 죄를 깨닫게 하고 구원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죽은 정통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이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예외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할까요? 첫 번째, 우리는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처한 상태가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고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훌륭한 믿음의 선조들도 있었습니다. 9:4-5절 목록을 보십시오.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설교와 구원의 메시지를 배척하였습니다. 고후3장에서 바울이 말한 마음과 눈이 수건으로 덮혀 눈먼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성경을 자랑하면서 성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이 가장 먼저 요구됩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정통은 좋지만 살아있는 정통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우리도 성경의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가 자기주장이 아니라 모든 검증을 성경에서 찾는 것을 압니다. ”19 모세가 이르되 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우리도 항상 성경으로 자신의 교훈을 입증해야 합니다. 자신의 체험이나 자기가 배운 교육,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비성경적이라면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성경의 자로 판단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 우리는 성경을 전체로 취급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우리를 살피도록 해야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성경을 우리의 편견을 입증하거나 우리의 입장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을 복종시켜야 합니다. 문자에만 머무르지 말고 정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전체로 취급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벧전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이러한 기쁨이 충만합니까? 성령으로 충만하여 새 술에 취했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전체로 취급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통적이면서도 기쁨이 충만한 교회였던 초대교회를 닮아야 합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개혁주의 교회를 위한 몇 가지 호소를 저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첫째,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옳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항상 살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항상 열려있어야 합니다. 살전5: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했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자꾸 질적으로 내려가는 경향이 있음을 간파한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 무시하지 않습니까? 혹은 그것이 새롭다는 이유로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진리에 항상 열려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절대로 우리 지식따라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유대인들의 실수를 배워야 합니다. 유대인들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 호소는 소망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항상 동일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도 항상 동일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일하시기 때문에 지금 우리를 위한 목적도 같고, 역사하시는 일도 같고, 하나님의 능력도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고집을 피우더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20 ...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21 ...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무시하고 지나가십니다. ‘백성 아닌자들을 백성으로 넣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 일을 계속해 오셨습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 개인이나 교회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중세시대에 교회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 새로운 백성을 일으키셨습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한 놀라운 진술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을 구해달라는 간절한 호소에 에스더는 머뭇거렸습니다. 그러자 모드드개가 말합니다.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하나님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으십니다. 10장 마지막 말씀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교회 전체가 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계속해 나가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버림받고 다른 사람을 사용하신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기하게 하시려고 다른 사람을 세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 결론

오늘날 개혁주의자들인 우리를 성령께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강력한 요청을 하고 계심을 느낍니다. 우리의 마음이 굳어있거나, 제도 속에 고착되어 있거나, 어떤 운동에만 집착하여 실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굳어지고 경직되고 형식화되어서 성령의 신선한 바람을 용납할 수 없거나, 하나님이 우리를 제쳐두시고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이행하시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일으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10장의 마지막 구절에서의 경고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경고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다루시도록 복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결과가 일어나든지 온전히 복종 하는 성도가 됩시다.

 
하나님의 실수 없는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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