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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0-30롬10:16-17 순종의 시금석
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0-30롬10:16-17 순종의 시금석
  • 정원우
  • 승인 2021.11.25 0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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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들어가는 말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이 복음을 평생 들어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한 마음으로 듣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참으로 들었습니까? 진실로 듣는 사람은 보이는 귀로만 아니라 내면의 귀로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복음이 내 마음에 와 닿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혹은 참된 들음의 표지가 있습니까?

. 본론

첫째, 참된 믿음의 결과들

사도는 복음을 듣는 우리에게 주요한 두 가지 시금석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모태신앙으로 오랫동안 예배당에 다니며 말씀을 들었고 이제 무슨 설교가 이어질지 훤히 보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생명있는 들음의 첫 번째는 바로 순종입니다.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복음을 못 들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 들었습니다. 사도는 그것을 계속 강조합니다. 18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문제는 순종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여기서 순종이라는 단어가 16절에서 전하다라는 말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17절에서 들음이라는 두 단어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합성어인데 어떤 힘으로 듣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어떤 권위에 굴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순종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순종이란 성령 안에서 듣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1장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16장에서도 두 번이나 언급합니다. “19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26 ...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

사도 베드로도 편지를 받는 나그네들을 벧전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여기 롬10장에서 우리 자신들과 복음을 듣는 우리의 모든 자세에 적용시켜야 할 시금석을 우리에게 제하고 있습니다. 왜 이것이 꼭 필요합니까? 오늘날 단순히 지적으로 복음에 동의하는 신앙주의가 널리 퍼져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지에 대한 혼란이 만연한 시대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기쁨이 없는 이유이며 세상에 무기력한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지적 동의와 참된 믿음의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가 행하는 구분이며 야고보 사도도 2장에서 행한 것입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를 테스트하는 시금석은 그의 믿음에 순종의 요소가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동의하지만 순종하지 않는다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아주 미묘한 문제이지만 참된 믿음에 대한 중요한 시금석입니다.

다음은 참된 믿음은 항상 행동으로 이끕니다. 행동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행동에 대한 많은 예화가 있지만 먼저 빌립보에 살았던 리디아를 봅시다. 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이것이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적용하심으로 참된 들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마음을 여셨습니다. 주님께서 마음을 열지 않으시면 누구도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그래서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말씀으로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던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그의 속에서 그를 이끄는 힘이 살아있는 믿음이 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들음이 미묘하지만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참된 들음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행동과 순종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사로잡힘과 함께 들음이 있어야 참된 들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요점회개입니다. 순종은 회개를 포함합니다. 회개는 죄를 깨닫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고 본성적으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변호하는 사람은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의미에서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들음은 죄를 진정으로 깨닫고 인정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죄를 자백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변명을 중단합니다. 이제 죄짓기를 포기합니다. 죄가 무엇인지 알고 증오하고 떠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섭니다. 가장 위대한 소원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과 똑같이 복음을 들으면서도 이것들을 전혀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순종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와같이 살아있는 들음이 되는 순간, 여러분은 여러 단계를 거쳐서 이제 하나님을 알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중요한 요점이 바로 이 단계에서 들어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는 나는 이런 일을 하겠다스스로 결심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참된 회개가 오면 그런 결심을 중단합니다. 자기 속에 선한 것이 전혀 없고, 자기의 의는 더러운 옷에 불과함을 인정합니다. 또 더 선한 삶을 살겠다는 결심도 쓸모없음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것이 오염되었고 무가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하거나 자신을 의롭게 만들려는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순종의 한 부분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 앞에 자신을 의롭다 만들 사람이 없다는 성경의 선언을 받아들입니다.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그런 다음에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길을 받아들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를 담당하시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는 메시지를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죄를 자백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를 값 주고 사셨으니 이제 더 이상 자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을 영광스러운 성자로 고백합니다. 이제 조금도 의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순종이며 예수는 주시다고백하게 됩니다. 가이사도 누구도 주가 될 수 없고 오직 나사렛 예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을 9-10절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결국 예수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그분만 의지하게 만듭니다. 그에게 복종하고 그의 멍에를 맵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것은 그에게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탁이 바로 믿음의 순종에 포함된 모든 것입니다. 의탁하지 않는 것은 복음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겉으로만 들은 것이며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참된 들음에서 나오는 믿음은 항상 의탁으로 이끕니다. 이제 그의 백성이 됩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복음의 효력에 대해서 흥미로운 가르침을 줍니다. 살전1:5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달리 말하면 여러분은 사도로부터,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그들이 우상에서 돌아선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포기했습니다. 우상을 버렸습니다. 우상에서 등을 돌리고 교회에 속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에 그러한 포기는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박해와 순교와 가족으로부터 배척을 의미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교회에 가입하였고 이 교훈을 따르는자들이 받는 모든 불명예를 감수했습니다. 그리고 이단이라고 정죄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결심은 금방 사라질 결심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박해와 역경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계속해서 붙잡고 전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순종이라는 단어에 포함된 의미를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21:28-32 두 아들 비유에서 잘 설명하셨습니다. 주님은 회개란 본질적으로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에 가지 않겠다고 했으나 나중에 뉘우쳤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뉘우치고 갔으니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을 했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두 가지 들음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순종이라는 시금석을 통해서 측정되어야 합니다

둘째, 순종의 시금석

정확한 이해를 위해 여기에 대한 두 가지 논평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여기에서 나는 행함에 의한 칭의를 설교하는 것인가?“ ’믿음으로만 얻는 칭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우리가 믿는 것에 부가적으로 이러한 것들을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확실히 행함에 의한 칭의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는 뭔가를 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능한 주장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확인해야 할 큰 문제입니다. 사도바울과 사도 야고보의 견해를 대조해서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둘 사이에 모순은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바울서신과 야고보 서신이 모두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고 믿으며 그렇기 때문에 둘 사이에 모순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성경을 반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만이 진리이며 우리는 이것만 설교해야 합니다. 이것이 로마서의 전체 핵심입니다. 루터가 이 위대한 진리를 발견한 것도 성령의 계시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것은 신앙주의입니다. 자신은 예수를 믿으니 율법에 반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믿음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와 바울의 주장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듣고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했고, 야고보도 참된 믿음은 항상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믿음을 시험하지 않았다면 바로 들었는지 잘못 들었는지 말할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항상 행동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여기서도 순종을 말합니다. 그 순종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인이 포함되지 않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순종으로 나타나야 참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와 바울 사이에는 조금도 모순이 없습니다. 둘 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를 가르칩니다. 주님께서도 행하지 않고 말로만 하는자들을 물리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하나님은 순종을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떨어질 수 있는 큰 위험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택과 예정뿐 아니라 책임도 성경의 가르침에 있어서 본질적인 부분임을 잊습니다. 9장에서도 선택의 교리를 강력하게 선포하면서 역시 책임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거절한 유대인들의 책임을 말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10장 나머지 부분에서도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1장에서도 같은 원리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누구도 변명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책임이 있습니다. 여기에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누구도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구원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물론 구원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의 결과로 구원받았다는 것이지요?“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가지는 항상 함께 가야 합니다. 누구도 자신이 믿기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리 아시고, 택하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불신앙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 순종하지 않은 유대인들의 죄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자유의지를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그 좋은 자유의지로 왜 믿지 못합니까? 그들의 말이 스스로를 정죄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설교에 있어서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오늘날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중 누구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해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타락한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면 그때는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시간 속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순종하는 것 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9장에서 말하듯이 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 불신앙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책임도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둘 다 붙잡아야 합니다. 누구도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지만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정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논평입니다.

두 번째, 오늘날 이단 종교에 빠진 사람들 중에 그들의 삶이 이전과 비해 확실하게 달라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목사님은 지금까지 참된 믿음을 가려내는 시금석이 순종이라고 계속 주장해 왔는데 모순되지 않습니까?“ 묻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순종이 다 그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유일한 단서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열거한 믿음의 내용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인격, 그의 속죄의 희생적인 죽음, 부활과 승천 등, 이것들이 구원하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 믿음에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보이스카우트같은 순종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러한 순종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말씀을 적용하실 때, 먼저 그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깨닫게 하시고 생각과 마음과 양심과 의지를 깨어나게 하시고 그러면 겸손해지고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시쁘시게 하려는 소원이 나오게 됩니다.

둘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단순히 어떤 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오늘날 행동주의가 득세하는 시대입니다. 행동주의의 가르침이 인생의 해결책이라고 여기저기서 외쳐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그러나 그런 주장을 하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롬6:17으로 돌아갑니다. 6:17 ”...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여러분의 순종에 이런 신적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믿음의 순종은 아닌 것입니다.

. 결론

그렇습니다. 순종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내면이 움직여서 나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선한 행실은 사람이 나무에 매달아 놓은 사과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과 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을 먹고 자라서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차이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말하는 살아있는 순종입니다.

 

순종의 시금석
순종의 시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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