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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0-29 롬10:16-17 믿음이 생산되는 방식
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0-29 롬10:16-17 믿음이 생산되는 방식
  • 정원우
  • 승인 2021.11.23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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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들어가는 말

우리는 설교자의 부르심과 메시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겠습니다.

. 본론

첫째, 믿지 않는 이스라엘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10장에서 유대인을 다루는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9장 끝에서 이스라엘 전체의 문제를 이해하는 열쇠를 주었는데 9: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왜 이르지 못했습니까?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이사야의 예언이 입증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노력했지만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도 시도하고 믿음으로만 얻는 이 구원의 길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 통해서 메시지를 주셨다는 것을 살폈습니다. 이제 사도가 말하는 분명한 사실은 모든 사람이 복음을 믿은 것이 아니며 또 믿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하나의 사실을 말하는지 아니면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하나의 반론을 제기하는지 주석가들 사이에 논란이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어떤 반대자들이 하지만 그것이 진짜 구원의 방식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대다수가 거절했어요. 그렇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 되겠어요? 당신은 단지 설교의 문제와 사람들이 믿는 것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 말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그 같은 효력을 나타낼 것 같지는 않군요라는 유대인들의 반론을 사도가 상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장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설교되었지만 단지 일부만 믿었을 뿐이라는 사실은 진술하는 것일 뿐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그러므로 이것이 구원의 방식과 관련해서 사도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을 폐지하는 것일까요? 사도가 그것을 다루며 즉시 답을 줍니다. “아니요, 당연히 그러한 의미가 절대로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이유를 살펴봅시다.

그러면 사도가 겪는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로마서 같은 위대한 서신서를 연구할 때는 항상 사도의 실제적인 가르침과 사도가 교훈을 제시하는 방식 혹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사실 사도가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 오늘날보다 더 중요한 때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바른일을 하지만 잘못된 방식으로 주제를 다루고 해결책을 제시하여 유익보다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리뿐 아니라 방법도 옳아야 합니다. 실제로 개혁주의자들이 다소 바르지 못한 복음주의자들을 쉽게 비평합니다. 저는 롬10장 처음부터 사도가 자신의 대적자들에게 얼마나 사랑스러운 자세로 편지를 쓰는지 말씀드렸습니다.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그의 마음이 유대인들 때문에 부서집니다. 우리의 마음도 진리를 반대하거나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부서지지 않으면 진리를 강해하는 자세가 나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메시지를 다루는 만큼이나 방법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참으로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바울이 어떻게 이 문제를 다루어 나가는지 주목해 봅시다.

첫 번째로 모든 사람이 복음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예언된 것입니다.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53장의 인용입니다. 이제 그가 말하는 순서를 주목합시다. 그는 53:7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그리고 이사야의 인용으로 다음 논증을 계속합니다. 이사야는 구원의 길이 좋은 소식의 선포로 나타났다고 말하는데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이러한 질문을 드렸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방식으로 이스라엘이 불신앙의 죄를 항상 범해왔음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사도 보다 800년 전 이사야 시대에도 똑같은 죄를 지었고, 편지를 쓰던 때에도 똑같은 잘못을 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은 항상 당시 현장의 백성들에게 주는 말씀이며,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예언이라는 두 가지로 취급되어야 합니다. 53:1의 예언은 그때에도 일어났고 메시야의 시대에도 일어날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구약의 증거를 계속 인용하며 그것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는 애통하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실족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모든 예언되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불신은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그점이 자주 인용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도 목회적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을 자랑하고 그렇지 못한 이방인들을 멸시했습니다. 이러한 입장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이점을 다루셨습니다.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여러분이 그러한 사람들을 다룰 때는 그들이 영광스러워하는 성경으로 그들이 복음을 거절한 방식을 설명함으로 그들의 무지를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우리도 이같이 그런 사람들을 다룰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주장만 하다가 결국 싸움으로 끝나게 됩니다. 우리가 붙잡을 것은 오직 성경입니다.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사도처럼 성경을 손에 들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당신이 성경을 전적으로 신뢰한면, 당신의 믿음과 행위의 권위를 성경에 둔다면, 이 문제를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봅시다.“ 말하면 됩니다.

또 다른 요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 복음에 대한 모든 것이 예언되었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사도들도 구약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만으로 충분하고, 여러분이 구약을 보는 영적 눈이 있다면 여러분도 구약에서 복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와 모든 설교자들이 그 당시에 예언의 성취가 일어나고 있음을 끊임없이 보여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인용 구절이 없더라도 이 구절하나만으로도 선지자들의 독특하고 신적이고 무오한 영감을 증명하기에 충분합니다. 실제로 사건이 일어나기 800년 전에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 메시아를 거절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생명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가 오시면 모든 사람들이 다 믿고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두가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분명하게 인용하니 유대인들이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 있습니다. 벧후1: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예언은 사람의 관점이나 사람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람이 생각해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사로이 풀 수 없습니다. “21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이것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적인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의 내용과 통일성에 대한 놀라운 증명을 발견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위대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성경이 순전하고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합니다.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는 것은 우리가 믿는 것이 진실함을 가장 크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방식입니다. 이제 구약을 인용하는 것을 더 정교하게 진행합니다.

여러 면에서 볼 때, 17절은 16절의 주해입니다. 사도가 유대인의 불신앙에 놀라지 않는 이유는 성경에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문제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러한 차이가 생겼습니까?” 그래서 두 번째 요점은 바울은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점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그렇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증거해 왔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부분입니다.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지만 모두가 믿지는 않습니다. 전해진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들음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봅시다. 16절과 17절에서 두번씩 사용되는데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첫 번째 사용할 때는 16 순종하다로 헬라어 어원은 듣다에서 온 것입니다. 듣는 것의 특별한 형태가 순종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전하다라고 했는데 17절의 들음이라고 두 번 번역된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누군가가 전했다는 것은 누군가가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그들이 들은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기본적으로 전하는 것은 듣는 것입니다. 바울은 17에서 두 번이나 사용합니다. “17 믿음은바울은 말합니다.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첫 번째 들음은 듣는 행위입니다. 두 번째듣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16절은 듣는 내용, 메시지를 의미한다는 것을 살폈습니다. 17절은 16절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로 한 단어가 여러 장소에서 다른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문맥에 따라 결정해야 합니다. 본문도 듣는 내용보다 듣는 행위로 받아들이면 의미에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듣는 행위와 듣는 내용이 둘 다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합니다.

6:9-10에서 하나님께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씨뿌리는 비유에서 두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그리고 오늘 두 구절이 나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복음은 항상 이런 분리를 일으킵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행28장에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직후에 복음을 전했는데 똑같이 유대인들이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 이사야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똑같은 내용이 롬10:17절에 설명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귀로 듣는 것과 믿음으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복음을 듣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같은 메시지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그들의 됨됨이와 마음 상태 때문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교리를 어려워하니 비유 이야기로 쉽게 풀어 설명하셨다고 하는데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생각입니다. 주님께서 두 가지 결과를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13:11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8: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어떻게 들을까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회중들을 위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의자에 앉아서 편안하게 듣고 내가 이것을 들었다 저것을 들었다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자기는 항상 복음을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날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될 것입니다.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주님께서 산상설교 끝에 하신 이 말씀을 듣게 될 자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주여 주여외치며 들었다고 말하겠지만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 내게서 떠나가라하실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세 번째, 들음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기계적인 들음과 믿음의 들음입니다. 제가 볼 때,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들음입니다. 사도는 여기서도 말씀을 인용합니다. 3에서 우리는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믿음의 차원에서 행함의 차원으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사도는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듣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10:17절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모든 사람이 다 들어도 진정으로 듣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보러 왔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50년 동안 예배를 봤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그가 복음을 들었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참된 들음이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둘째, 참된 믿음이 생산되는 방식

그렇다면 참된 들음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이 빌립보에서 안식일에 기도하러 강가에 갔다가 모여있는 여자들을 발견하고 다가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16:14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이것이 믿음을 일으키는 참된 들음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께서 마음을 열지 않으시면 참된 들음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육에 속한 사람은 복음을 들어도 어리석게 들립니다. 성령께서 그를 다루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루디아도 주께서 청종하게 하셨을 때, 바울의 메시지를 즉각적으로 붙잡고 주목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것으로 자신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예배당에 와서 복음을 듣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습니까? 부모의 말을 거역하거나 상처 주기 싫어서 억지로 나오지는 않았습니까? 나와서도 딴짓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나름 열심히 설교를 듣기는 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설교가 자신을 향해 말을 걸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설교 말씀이 살아서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 말씀이 바로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알고 그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루디아에게 일어났던 바로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듣게 될 때, 말씀을 받아들이고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들음이 중요한 차이를 만드는 첫 번째는 들음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옵니다. 그러한 들음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그러한 일은 전파‘, ’전도라는 미련한 일로 이루어집니다. 메시지로 되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란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항상 그러한 메시와 관련해서 도출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그리스도의 말씀이 두 가지가 믿음을 일으키는 동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에 집중되어있지 않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고전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말씀이 성령으로 적용어야 합니다.

말씀 안에 씨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 씨를 심으시고 우리 안에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실때 우리가 새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1: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그리고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살전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사도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때 그들이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임하게 된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성령께서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실 때 일어납니다. 그것이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는 차이입니다. 말씀을 들을때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여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셨습니까?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여셨습니까?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결론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자들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일하셔서 믿고 구원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믿음의 생산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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