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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0-27 롬10:14-17 참된 설교
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0-27 롬10:14-17 참된 설교
  • 정원우
  • 승인 2021.11.20 2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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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들어가는 말

설교자의 부르심과 보내심에 대한 문제를 살폈습니다. 그리고 메시지를 고려하면서 메시지의 내용은 무엇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에 대한 사실들임을 살폈습니다. 이제 이 메시지의 일반적인 특성을 살펴보겠습니다.

. 본론

첫째, 복음 메시지의 보편적인 성격

사도가 인용한 말씀 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여기서 우리는 복음 메시지의 보편적인 성격이 기쁜 소식임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속박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언덕을 바라보고 구원자를 소망하는데 한 전령자가 오는 것을 보았고 그가 전하는 기쁜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즉시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사실은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발자국의 정체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8:4에서 만납니다.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좋은 소식을 알린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인데 이것이 여러분에게는 기쁜 소식입니까? 이것이 시금석입니다. 복음은 항상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사회적, 도덕적 상태, 전 세계의 상태, 교회의 상태 모든 것이 복음 메시지가 무엇인지 절대적으로 확신해야 함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떠나서는 현상 황을 다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지금까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다 실패한 것을 우리가 눈앞에서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실패를 너무 자주 반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보다 과학과 교육을 맹신하던 때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코로나로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은 세상의 과학과 교육에 신뢰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소망은 복음입니다.

왜 교회가 그같이 무기력합니까? 기독교인이 한 명도 없었던 나라가 불과 100여 년 만에 20%가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지난 수십 년동안 계속 내리막길을 걷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00여년 전 놀라운 부흥에서 계속 뒷걸음질 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날 교회가 과소평가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코로나로 병원에는 사람이 넘쳐나는데 교회는 텅텅 비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코로나로 집회제한을 받는다면 전화통화로 말씀에 대한 요구가 빗발쳐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교회의 상태는 코로나가 아니라 오직 한 가지로만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복음 메시지가 거의 설교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 복음, 거짓 설교에 의해서 사람들이 교회 밖으로 쫓겨나는 면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논쟁을 가장 싫어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긍정적인 설교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우리가 복음전파뿐 아니라 복음을 위한 변호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상태와 교회의 상태를 본다면 우리는 유일한 치료 방법인 복음 메시지로 우리를 다시 검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통해서 참과 거짓을 가려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분별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두말할 것도 없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TV에 나오는 평가로 교회를 욕하기도하고 칭찬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바른 기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바른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4:14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사람은 영적 아기들입니다. 아이들은 보암직도하고 먹음직도 하면 무엇이든지 따라갑니다. 그들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가르침입니다. 사도가 제시하는 일반적인 시금석은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성탄절에만 부르는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사순절에만 부르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성탄과 십자가와 부활은 일년내내 불러야 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면 복음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둘째, 거짓 복음

어떤 사람이 설교한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바른 설교를 한다는 보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종종 복음전도자를 현장에 서서 설교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전도자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가 설교하는 내용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도덕윤리라고 생각합니다. 19세기에 토마스 아놀드에의해 대중화된 개념이라고 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기독교는 선한 작은 신사들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설교도 순전히 도덕적인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란 우리가 선한 삶을 격려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단지 선한 사람이 되도록설교하고 서로 돕도록 권하는 간단한 설교나 연설을 많이 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설교는 사람들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 이것저것을 하라말라는 식의 설교에는 기쁜소식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설교를 테스트하는 방법입니다.

첫 번째, 설교에는 반드시 기쁜 소식의 요소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는 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사도가 그의 서신서 전체를 통해서 특별히 롬10장 전체를 통해서 그 점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꾐에 빠져서 그러한 실수를 합니다. 복음의 영광을 제거하고 새로운 율법쯤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두 번째, 복음은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답변따라 살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설교란 그저 자신의 회중에게 질문하고 답변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복음은 일련의 정치나 사회문제의 강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설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하지만 신약의 가르침에서 완전히 떠났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독교란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치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람들에게 삶의 개선과 개혁을 촉구하고 함께 참여함으로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여러 곳에 파송된 선교사들도 자신의 소명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정치에 참여하고 그들의 문제를 나누고 그들의 환경속에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설교자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몇 세대가 가지 않아 금방 복음화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100여 년전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장이라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설교자들이 많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 사회적 행동일 뿐입니다. 거기에 좋은 소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넷째로 잘못된 개념이 본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저명한 목사는 기독교란 하나의 생활방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은 정신을 가지고 삶을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교리적인 찬성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조건이 된다는 주장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강의를 통해서 그러한 주장을 해왔고 또 종교신문에 자신의 인터뷰에서 거듭 주장하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로마서 강해에서 주장하는 모든 것을 반박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학적 사조가 예수님의 교훈은 찬성하면서도 동정녀 탄생, 삼위일체, 속죄의 교리같은 근본적인 교리들을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설명할 수 없기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믿으려하지 않을 것이니 그러한 것을 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암을 일으키시고, 영원한 고통에 처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려 한들 교회가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그 형상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예수의 영과 갈등을 일으킨다면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것도 진실일 리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성경으로 예수님을 말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성경을 판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지루하게 하려고 제시한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진술을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예수님의 정신으로 판단합니다. 그 정신이 무엇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도, 예수님도 아닙니다. 저는 교회가 그러한 생각 때문에 교회가 오늘날 이런 상태에 있다고 주저 없이 말씀드립니다. 이런 사람의 가르침은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용납하는 교회들과는 절대로 연합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기독교 메시지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좋은 소식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좋은 소식을 공격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본받는감상주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다섯 번째, 복음은 단순히 철학적인 관점이 아닙니다. 우리는 뭔가 수준을 높여서 인생에 대해서, 그리스도를 지적이고 철학적으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복음은 조잡하지도 비지성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주의 복음이 성경에서 얼마나 멀리 나갔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서 뭔가 깨닫고 자유함을 느겼는데 그것이 예수의 부활이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할 일은 불신자들을 회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렇게 막연한 어떤 자유가 퍼져나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이 무덤에서 문자 그대로 일어나는 체험을 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감각적인 예수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희를 느끼고 예수를 인격

적으로 만나게 되었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복음이라면 저는 절대로 여기 강단에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섯 번째, 마지막으로 메시지의 내용이 아닌 것을 말씀드립니다. 복음은 로마 카톨릭주의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물론 로마카톨릭이라고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도 있고 올바른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교회와 교회의 가르침을 믿고 복종하라고 합니다.

왜 위의 여섯 가지 주장이 잘못된 것입니까? 먼저, 위의 주장들은 신약의 가르침과 비교하면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신약에서 그런 가르침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로, 어느 것도 복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뭔가 해야 하고 선한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선한 삶을 사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자신을 믿으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보냄을 받아 선포하고 산을 넘고 달리고 사람들은 그가 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복음 메시지의 핵심은 좋은 소식입니다. 12:37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그들은 예수를 의식하는 것’, 예수의 자유가 전염되는 것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제자들이 겪었다는 이상한 경험에 무슨 진리가 있습니까? 진짜 기독교의 완전한 지혜는 이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자신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듣고 즐거워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단어로, 말로 전달된 것입니다. 철학적인 가르침이었다면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설교자의 설교를 즐겁게 들을 수 없다면 그는 하나님에의해 보냄받은 설교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한이 옥에서 두 제자를 보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11:3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4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이것이 기독교 복음과 다른점입니다. 헬라 철학자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헬라인과 미개한 야만인으로 분류했습니다. 가난한 자들, 배우지 못한 자들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그들의 수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보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이점을 말했습니다. 고전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은 가난한 자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 계몽되지 못한 자에게도 전파되는 것입니다. 연로한 사가랴에게 복음의 빛이 비추었더니 이렇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1: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그는 난해한 철학을 하나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정신을 이해하라는 요구도 없습니다.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는 도덕적 권면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지입니다. 가난하고 무식한 목자들이 밤에 양떼를 지킬 때, 천사들이 어떤 메시지를 주었습니까?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 그런 다음에 천군천사가 찬양합니다.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그리고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식을 눈으로 확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과 환희로 가득찼던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똑같은 것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오직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23 주의 길을 곧게 하라는 소리입니다. 세레요한은 사40:3을 인용한 것입니다. 40:3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곧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산을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도착했습니다.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건을 들으라고 용

한이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단순히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특성입니다. 설교자가 전할 메시지의 본질은 기쁜소식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 우리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그리고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그 일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아보사 구속하셨도다이것이 위대한 메시지의 특성입니다.

거짓된 복음에는 이러한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기쁨도 환호도 어떤 것도 없습니다. 전부 인간적이고 인간이 만든 신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3장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그러나 이제는이것은 천사장의 소리입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결론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만참 사람들로 하여금 소리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른 가르침은 절대로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한껏 세련을 한껏 부리지만 포기도 자유도 영광도 찬송도 감사도 기쁨도 없는 거짓 복음을 거부해야합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기쁜 소식을 붙잡는 복된 광복절, 복된 주일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참된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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