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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0-26 롬10:14-17 하나님의 부르심
마틴로이드존스 로마서나눔 10-26 롬10:14-17 하나님의 부르심
  • 정원우
  • 승인 2021.11.19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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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들어가는 말

14-15절은 보편적인 부르심에 대해 16절은 그들 속에서 어떻게 효력이 발생하는지 보여줍니다. 우리는 첫 번째 대목으로 선교의 대헌장의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선교사역의 결과로 일어날 수 있는 몇 가지 문제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설교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중요한 구원의 방식으로 가장 강조됩니다. 그래서 날아가는 시대 시대마다 설교를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설교자의 소명이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본론

첫째, 사명을 받은 설교자

신약성경에서 설교자는 항상 보내심을 받은 자였고 그들을 통해서 초대교회 질서가 세워졌다는 것을 봅니다. 설교자로 부름받는 것을 고려하면서, 일반적인 것은 설교자로 부름 받는 데는 개인적인 요소가 있으며 교회에 의해 확증된다는 것을 보여드렸습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요소는 아니지만, 오늘날 스스로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은 자신이 설교자로 소명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는 무엇을 느끼고 그렇게 판단하는 것입니까?

첫 번째, 심령의 압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구하지 않았는데 그 부담이 여러분에게 임합니다. 본인은 그러한 생각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잊으면 다시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소명을 느낄 때, 그 느낌을 지워버리려고 애쓰는 것도 좋은 시금석입니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소명이라면 그것이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고 피할 수 없는 압력으로 작용합니다. 그것을 피하려고 거듭 결심해도 되돌아오는 심리적 압박에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주시는 이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주님의 짐이라고 했던 의미에서 짐을 말합니다. 설교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부담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을 적당히 해나가지 않습니다. 어려움에 있는 설교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모든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그는 영혼에 대한 강한 부담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하고 싶어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강박의식이 있습니다. 사도가 고전9장과 고후5장에서 말하는 강박의식은 소명의 문제에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자신도 어쩔 수 없습니다.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예레미야는 20:9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다했습니다. 어떤 결과를 맺든 계속 말해야 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사역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벗어나 계십시오여러분이 사역에서 벗어나 조금도 있을 수 없을 때, 사역에 임해야 합니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설교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이러한 점들을 전혀 느끼지 못한 사람은 설교할 권리가 있는가?” 질문이 포함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설교자는 선포하지 않으면 안 될 압박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선포합니다. 오늘날에도 목회는 경재적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딤후2: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구약시대 레위인들은 기업을 소유하지 않았고 다른 지파들로부터 지원을 받았습니다. 고전9:7-14에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고전9: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설교자와 레위인이 같은 위치입니다. 성도들의 선의와 믿음에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설교자는 다른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살지 않고 복음으로삽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평신도 설교자가 위험한 이유는 자신이 큰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도 불안감을 모르른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어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훈련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 반대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사례를 받지 않았다며 그들은 목회자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다는 개념 자체를 반대합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런 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원칙이다. 주님께서 이것을 명하셨다“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후11:7-12을 보면 고린도 교회 상황은 예외적인 경우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울을 오해하고 비난하는 대적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받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나 아가야 지역의 상황에 따라서 성경적 규칙을 다양하게 적용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평신도와 성직자 간에 구별을 짓자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라고 해서 성도들보다 특별한 존재는 아닙니다. 계급적인 구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신약성경은 질서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를 세우시고 교회에 질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분명히 소명을 받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였고 교회도 확인했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버리지 않으실 줄 압니다. 우리의 입장은 이것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설교자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가지고 교회의 확인을 통해서 설교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무엇을 전하는 사람일까요? 설교자는 무엇을 말해야합니까? 사도는 52:7절과 1:15말씀을 인용하여 그 점을 지적합니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둘째, 설교자의 메시지

첫 번째, 영감의 문제입니다. 가장 오래된 사본에는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라는 구절이 빠져 있습니다. 후기사본에 발견됩니다. 그래서 한글 성경에도 빠져있습니다. KJV에 있는 내용입니다. 사본 정리자가 후에 덧붙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요점은 사도가 본문을 그대로 차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성경의 무오함을 해친 것입니까? 사도가 성경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요약하고 핵심만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성경의 영감과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에서 이탈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만큼 구약을 존중하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사도가 롬3장 초기에서 설명한 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유대인들에게만 그런 식으로 맡겨주셨다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고 한 글자 한 글자 조심스럽게 필사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을 대하는 유대인들의 태도였습니다. 우리는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영감을 주시고 인도하신 동일한 성령께서 사도바울에게 영감을 주시고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영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가 아닌 사소한 차이를 보이는 사52:7절에서 원문의 영감과 무오성의 문제도 의심할 필요가 없으며 그 말씀을 인용한 사도바울 또한 영감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벧후3:16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구약의 모든 책들과 같이 바울의 책들도 모두 영감된 성경입니다.

두 번째, 다시 한번 예언에 대한 이해를 열어줍니다. 9장에서 이미 구약의 예언서를 읽을 때에는 보편적으로 두 가지 요소가 구약에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문맥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하는 문맥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 직전입니다. 그런데 이미 포로에서 구원받는 것을 미리 보았다고 말합니다. 다가올 일에 대한 경고와 함께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오게 될 것도 함께 예언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입니다. 소망없는 포로상태에 빠진 수많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전령자를 보내시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여기서 바벨론 포로회복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물리적 구원을 넘어서는 영혼의 영역에서 무한히 높은 차원의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사야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징조를 보고 예언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약의 예언을 읽을 때는 항상 현재의 의미와 먼 장래에 이루어질 일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항상 주목하고 읽어야 합니다. 출애굽과 해방의 이야기는 사실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전하는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도 애굽은 세상이요 육신이요 마귀로 묘사합니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항상 묘사됩니다. 특별히 히브리서가 홍해와 요단을 건넌 것을 구원으로 묘사합니다. 신약성경에서도 항상 그렇게 사용하고 우리도 그렇게 사용합니다. 주님께서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후에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오셔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주님께 두루마리를 건네드려 읽게 하였을 때 주님은 사61장을 읽으셨습니다.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 21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이와같이 우리는 선지서들의 본래 의미 뒤에 있는 복음을 항상 발견합니다. 선지서들은 복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중에 이사야는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복음전도적 선지자입니다. 52:7에서 설교자는 산을 넘어오는 전령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설교의 메시지입니다.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그 소식이 무엇입니까?

셋째, 설교의 메시지

복음의 좋은 소식을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입니다. 왜 그것뿐입니까? 왜 그것만 반복해서 말해야합니까? 사람들이 쉽게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항상 오해할 준비가 된 것같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 메시지를 증거해야 합니다. 바울도 여기서 복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대답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그들이 어떻게 그분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까? 설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그들이 믿어야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믿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인격입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구원도 없습니다.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이것이야 말로 오늘날 가장 반복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인격입니다. “예수가 주님이시다이것이 초대교회 설교자들이 전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17:18 ”예수와 부활만 전했습니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설교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만 설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떠나서는 어떤 메시지도 없습니다. 그러니 설교자는 모두 그분만 설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분의 인격, 그가 영광의 주라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바로 이것이 설교입니다. 설교는 영원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위대한 사건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분에 대한 사실들을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설교입니다. 저는 사실들이라는 단어를 강조합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들을 떠나면 전할 메시지가 없게 됩니다. 불트만이라는 사람이 시작한 신학운동이 오늘날 인기입니다. 이 운동은 신약이 말하는 복음과 정반대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가 죽으셨다는 사실 외에는 어느 것도 믿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약에는 이 사실을 거듭 강조합니다. 동정녀 탄생의 이적, 1:35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그분의 생애, 그분의 가르치심, 이적들, 사도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만 설교했습니다.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적들을 설교했습니다. 이적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을 설교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고전2:2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 그리고 다시 살아나심이 물리적인 사실임을 선포했습니다. 무덤에서 나오셔서 선택된 증인들에게 자신들을 보이셨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감람산 위에서 승천하신 사실도 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이러한 사실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교훈뿐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자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과 이제 영광중에 하나님의 우편에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께서 오셔서 어떻게 초대교회 모든 지체들에게 부어주셨는지 말하는 것입니다.

. 결론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냄 받은설교자의 메시지 중에 첫 번째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자입니다. 그의 신성과 영원성을 전하는 설교자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 이 세상에서 하신 것, 부활 승천하시고 지금 무엇을 하시는지 모든 사실들을 증거하는자가 설교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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