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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렙의 믿음을 배우자
갈렙의 믿음을 배우자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21.09.11 1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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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12일 주일설교
수14:1~15절
강영철 목사 참된교회 담임

들어가면서

여호수아서의 구조는 1- 12장 전쟁, 13-21장 분배, 22-24장 고별메시지입니다. 지난 13장, 요단강 동편 땅 분배입니다. 그 시작은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 왜 다 정복하지 못했는가?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여호수아의 임무는 완벽합니다. 단, 중요지형지물만 정복하고 나머지는 천천히 정복하는 과정입니다.

14-15장, 유다 지파, 16-17장, 요셉 지파, 18-19장, 나머지 7개 지파, 20-21장, 레위지파와 간단한 사건순으로 분배를 저자는 기록합니다. 먼저 유다와 요셉의 나눔은 남북왕조의 틀로서 사기 구조 이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1. 갈렙의 믿음을 배우자  

1절, 유다 지파 분배 가운데 저자의 의도는 3그룹 (종교지도자, 군대지도자, 백성의 지도자) 함께 분배에 참여하였습니다. ① 공정성 때문입니다. ② 단순한 땅 분배가 아니라 영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고합니다. ③ 또한, 백성의 지도자는 증인, 수행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성직자 개인이 아니라 성직자 회에 있다는 하나님이 정치원리입니다. 

2-5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모세의 권위 즉,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 9개지파. 반 지파 분배, - 제비뽑기 방법으로 하나님이 뜻을 나타냅니다. 지금은 계시가 종결되었기 때문에 제비뽑기 방식이 아니라 말씀의 원리에 따라 결정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3절, 분배받는 지파와 레위 지파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4절, 12지파 기준으로 요셉 자손이 두 지파입니다. 5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이~, 약속과 성취, 즉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6절,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이고 갈렙은 유다 지파입니다. 갈렙은 그니스 사람이란? 먼저, 이방인 가운데 이스라엘 흡수되었다는 이론 ⓵ 창세기 이방 민족 ⓶ 에서의 장남 엘리바스 족속 중 하나 ⓷ 유다 족속 여성과 결혼(지금도 유대인은 모계사회) ④ 갈렙의 의미는 ‘개’ ⑤ 삿 1장 이방인 이름 가운데 갈렙을 언급으로 하여 이방인 중 흡수이론과 둘째, 원래 유다 족속 중 그니스 사람 이론입니다,

7-9절, 갈렙이 이야기하는 의도는 ⓵ 가데스바네아에서 정탐꾼 사건을 상기 “~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본문을 통하여 저자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 사람의 자격은 갈렙처럼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모자란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스라엘의 땅을 차지합니다.

10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 말씀을 성취하신 하나님입니다. 11-12절, 갈렙은 85세 노장이지만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 기존의 정복한 땅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산지를 믿음으로 요청합니다. 즉, 아낙 자손의 땅, 난공불락 그 산지를 요청합니다. 갈렙이 직접 전쟁을 해서 그 땅을 정복하겠다는 것입니다. 13절, ~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갈렙은 85세 믿음의 도전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성취를 믿으니까 갈렙은 도전하고 순종합니다. 14절,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드디어 민수기 가데스바네아의 사건이 마무리되게 됩니다. 저자의 의도이며 갈렙을 부각합니다. 우리 교훈은 숨이 붙어있는 것은 주신 사명을 완주해야 합니다.

2. ~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갈렙은 헤브론 땅, 얻을 땅, 아낙 자손의 땅, 하나님약속의 땅을 믿음으로 요청하여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6:26). 대게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은 우리가 가지는 소원과 기대를 충족시킬 방편으로만 예수를 찾고 있다고 꾸짖습니다. 실제 우리 신앙현실입니다.

그리고 더 나가 우리 주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요6:27).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게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기대하는 답, 형통과 안전을 주지 않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우리가 하는 일에 형통과 안전으로 쓰고 싶은 것입니다. 이건 굉장히 어려운 장애물입니다. 이 장애물은 평생 시달려서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전을 원하고 형통을 원하지만 그래서 실망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체념를 반복하는 중에 나이가 들어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자리에 오면, 생애를 돌아보게 됩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내가 좀 더 잘 살 걸~ 세상에 대해서 실망을 하게 되고, 세상이 주는 보상은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못해봐서 아쉬운 게 없는, 해봤지만 그게 약간의 유익을 줬던 건 사실이지만, 영생이 될 수 없는 인간이란 세상이 약속하는 것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더 깊은 답, 더 깊은 존재, 더 영광된 운명을 소원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값없는 하찮은 것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는 것입니다. 너희는 짐승이 아니야 너희는 기계가 아니야 너희는 소모품이 아니야 너희는 내 자녀야 내 자식이야 이렇게 살지 마. 이게 복음이며 구원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소원하는 것은 다 권력이며 자존심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자존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제자들도 그때는 몰랐다. 우리도 기대, 형통과 안전이 충족이 되지 않아 예수님이 잡히시자 다 도망간 것처럼 우리도 실천적 무신론입니다. 예수의 부활로 부활 생명에 의해서 이제 그를 알아보게 되자, 그의 생애를 역 추적해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가르쳐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그 역사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세대마다 출생하는 이 속에 하나님이 그의 구원 사역을 우리와 함께합니다. 마치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같이, 우리를 보냅니다.

거기서 무지한 자들, 하나님을 수단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 세상의 권력이 전부라고 믿는 자들, 또한, 여러 어려움 등을 만나게 됩니다. 그 인생을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그 현실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은 오셔서 우리가 잘못가는 그 앞에 서서, 얘야,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건 헛된 것이다. 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기다려 주십니다. 방해되니 비켜주시오. 비켜섭니다, 밟고 지나가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갈렙이 항복한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항복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실 수 있고, 질 수 있고, 죽으실 수 있는 데에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참뜻이 있습니다. 예수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우리 보고 그 인생을 살라 그럽니다. 그게 사람 사는 맛이 나게 하고 만족과 찬송을 준다고 약속합니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 인생이 이 위대한 길에 서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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