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21:29 (일)
[한국 근대사의 조명Ⅷ] 1946년 3·1절(三一節): 해방 후 첫 번째 역사논쟁
[한국 근대사의 조명Ⅷ] 1946년 3·1절(三一節): 해방 후 첫 번째 역사논쟁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21.06.13 14: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로 1946년 3월 1일까지는 3·1운동에 관하여 어떠한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3·1절이 가까워지면 일본 경찰이 1919년 3·1운동 때와 같은 대대적인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날까 봐 눈에 불을 켜고 조사를 하였다. 심지어 3·1절을 일본 천황을 섬기는 날로 만들어 한국인들이 일본 신사에서 참배하도록 강제하였다.

해방 후, 최초의 3·1절 기념행사를 1946년 3월 1일에 열 수 있게 되자 김구는 비상정치회의 창립하였고 이승만의 독촉중앙협의회와 연합하여 1946년 2월 1일 비상국민회의 조직하였다. 이어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을 2월 14일에 설립하여 비상국민회의를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전환하였다.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은 미군정에 3·1절 기념행사를 전국적으로 개최할 것을 요청하는 등 3·1절 기념행사를 주도하여 진행하였고 보신각에서 개최된 3·1절 기념행사를 그들의 공식데뷔 무대로 삼았다. 또한 3월 1일을 경축일로 정할 것을 미군정에 건의하였고 미군정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3·1절이 법적으로 인정된 첫 번째 공식적인 경축일이 되었다.

우익의 핵심적인 인물인 송진우는 국민대회준비위원회 단체를 설립하여 3·1운동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으로 삼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우익은 국민대회준비위원회 단체를 모체로 삼아 9월 16일 한국민주당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를 중심으로 각 정당·청년단체·부녀단체·종교단체 대표자 50여 명이 참석하여 3·1절 기념행사로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강대국들이 대한민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게 되자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펼쳐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천도교와 기독교를 중심으로 종교인들이 대거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에 참여함으로써 3·1절 독립운동은 전 민족적 거사로 나타났다.

3·1절 기념행사는 자주독립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기념하는 중요한 행사다. 하지만 좌익은 3·1절을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3·1절을 일으킨 세력이 기독교와 천도교 즉, 종교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과 같은 존재였기에 좌익은 종교세력들이 일으킨 운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좌익들은 3·1운동의 정통성을 부정하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3·1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사를 진행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좌익은 어쩔 수 없이 민주주의민족전선 단체를 만들어 3·1절 기념행사를 진행하고자 하였다. 조선민주당과 독립동맹을 참여시켜 좌익이 주도하지만 소수의 우익도 참여하는 기념전국준비위원회 창립하여 공동개최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약점을 보완하려 하였으나 이마저도 우익의 거부로 실패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좌익은 남산에서 3·1절 시민대회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로써 1946년의 3·1절 기념행사는 민주의원과 미군정 인사들이 참여한 기념식은 종로 보신각에서, 시민대회는 예정된 대로 각각 서울운동장과 남산공원에서 개최되었다.

좌파와 우파 모두가 3·1절 시민대회를 진행하게 되면서 어느 쪽의 행사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느냐? 가 민심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기미독립선언기념대회에는 청년, 학생, 부인들, 서울시 정대표 연합회 그리고 종교단체가 참여하였다. 또한,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이승만과 33인 대표 중 살아남은 분들이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기미독립선언기념대회 참여함으로 어느 쪽이 정통인지 분명하게 드러났다. 주요 언론에서는 서울운동장 개최된 기미독립선언기념대회에는 보도하지 않았으나 미군정 보고서에 따르면 10~20만 사이의 많은 사람이 참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좌익의 대표자인 여운형과 박헌영은 남산에서 개최한 시민대회에 15,000여 명 정도의 사람밖에 모이지 않자 기념행사에 불참하였고 시가행진마저 인원이 적어 포기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유일하게 보도한 대동신문은 “경축절에 나타난 통쾌한 무형의 국민투표 결정이었다”라고 보도하였다.

이승만은 3·1절 기념행사를 치른 후 “남한이 공산주의를 원치 않는다는 결심을 세계에 잘 드러낸 사건이었으며, 좌익 공산주의자가 남한의 소수임이 드러나는 행사였다. 모든 사람들과 합동할 수 있으나 공산주의와 합동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도 이들과 합하라는 것은 내 집에 불을 놓는 사람과 함께 일하라는 것과 같다”라고 3월 4일 담화를 발표하였다.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이 3·1절 기념행사를 통하여 그의 중요한 정치적인 자산인 역사적 전통을 성공적으로 이어오고 있음을 드러났다”라고 평가하였다. 이처럼 1946년 3·1절 기념행사는 한국 사람들의 민심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지표였으며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원하는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임을 전 세계에 알리는 사건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