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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달 특집] “6.25 어찌 이날을 잊으랴”
[호국보훈의달 특집] “6.25 어찌 이날을 잊으랴”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21.06.10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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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결정적 계기의 전공에 참전한 필자 소속 학도병들의 용맹과 희생’
이인수 목사 전) 온누리수련원장 6.25참전 무공수훈자
이인수 목사 전) 온누리수련원장 6.25참전 무공수훈자

 

“학도병아 잘싸워라 승리의 길로, 역전의 공산당을 때려부셔라 밀려오는 괴뢰군을 때려죽여라,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가자”

이 노래는 70여년전 북괴 김일성 도당이 이땅을 침노할 때 이민족이 강토를 지키기 위해 반공구국전선으로 달려가던 학도병들이 목이 터지라 부르던 노래다.

전에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에 전쟁이 있었던 일이다. 미국공항에는 중동행 비행기를 타기위해 청년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이 청년들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유대인 학생들로서 그들은 조국이 사느냐 망하느냐의 흥망성쇄의 기로에 처해있는데 공부는 해서 무엇하느냐면서 우리 조국을 구출하고나서 조국의 영광을 위해 공부해야지한다는 소명의지를 가지고 책을 덮어놓고 전쟁터로 자원해가는 학생들이였는가하면 또는, 결혼전에 근무했던 부대로 재입대한 18세의 여군은 임신의 만삭된 몸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지면 우리 조국이 없어지고 우리조국이 없어지면 뱃속의 생명도 존재할수없다면서 폭격기 조종사로 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적으로 미국공항에는 비행기에서 내리는 청년들이 있었다. 이들은 아랍공화국의 고관직 자식들과 부잣집 자식들로서 안전지대인 미국으로 도망쳐온 것이다. 이들은 조국이야 망하든말든 혼자만 살면 된다고하는 이기주의자들로 소명의식이란 전혀없는 표본적 인물들이었다. 결국 소명의식이 투철했던 이스라엘은 6일만에 그 전쟁에서 대승하고 말았다.

6.25사변은 세계 제2차대전의 마지막 내리는 전쟁이었다. 1903년 레닌과 스타린, 김일성등 3인이 레닌의 공산당 비밀조직으로 불쇄비키당을 세워 소련 중국 북한등이 공산사상으로 연대하여 강한 조직으로 기반을 잡았다.

그후, 레닌이 사망하자 스탈린이 불쇄비키당을 장악하고 혁명을 일으켰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스탈린이 조정하면서 스탈린은 김일성과 모택동등과 함께 공산진영을 좌지우지하게된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하자 김일성이 공산당 종국인 중공 및 소련과의 야합 또는 사주를 받아 6.25의 불법납침을 가맹함으로서 평화스럽던 대한민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우리의 피난민들의 행렬이 도로를 꽉메워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는 그 속에 끼었던 필자는 인근에 주둔하고있던 육군 제772부대에 자원입대하였다. 그당시 그 부대는 필자가 포함된 학도명 722명으로 새로 편성한 육본 직활독립 제1유격대 소속으로 7일간의 군사기초 훈련을 받고 군번도 계급도 없는 학생복장 그대로의 학병이란 완장을 팔에 두르고 자기 키만한 구구식 장총을 받아메고 1950년 9월13일 출발하여 부산항에 도착 LST 문산호배에 승선 다음날 새벽 4시반 적진 후방이었던 경북영덕군 장사리 강구해변에 도착 상륙전에 들어가자 그곳 적군으로부터 불꽃튀는 맹렬한 집중사격에 우리군 전투비행기가 출동 공중 사격지원하에 결사적인 상륙전에서 우리 부대원 절반이상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사방에 흩어져 쓰러진 시체들과 피투성이로 고통스러워하는 부상자들의 신음소리에 날씨마저 먹구름이 하늘을 어둡게 가리고 궂은비내리는 생지옥같은 현장은 눈뜨고는 차마 볼수없을만치 참혹하기가 이를데없었다.

이때에, 우리부대에 주어진 임무는 맥아더장군이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하기 위한 양동작전으로 적군주력보급로인 포항전투와 영천방면 국도를 완전 차단시키고 적후방활동을 마비시키며 적2개연대와 전차4대를 영덕방면으로 유인하여 경주 부산을 사수하고 서울을 수복하는 6.25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메 다대한 전과를 올림으로해서 1953년 12월27일자(육군고부제138401호)로 우국청년(의사란호칭)이처럼 학도병들의 용맹과 희생과 전과를 올림에 대해 맥아더장군은 우리 부대원들의 전공을 높이사서 최고찬사의 친서를 보내주기도했다.

국가보훈처 확인조사에 의해 당시 영남일보사에서 보도한 기사에 보면 장사리전투에서 우리 학도병의 전사자 유품발견 무려 300점과 부상자 92명 상륙전에 승선했던 LST배 한척이 적의 폭탄에 맞어 침몰등이 확인되었다고했다.

또한, 국방부가 발표한바에 의하면 6.25참전 지원국가수는 유엔군 16개국과 그 외에도 전쟁물자지원해준 나라가 19개국이 더 있으며 6.25 전란으로 입은 전체적인 피해와 손실은 유엔군 전사자 36,772명 한국군 전사자, 27만명 유엔군 부상자, 23,000명 행방불명자 3만명 전쟁고아 53,000명 전쟁과부 323,000명 그리고 공산당에 의해 학살당한 우리 교역자 535명 불탄교회 267개소 전소 파괴된 교회당 1935개소등이라했다.

그리고, 6.25전쟁당시 미 24사단장인 딘소장은 부상당한 부하에게 물을 떠다주려고 한밤중에 벼랑길을 내려가다가 심한 부상을 입어 포로가 되었고 벤프리트장군은 6.25전쟁에 아들을 참전시켯다가 전사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크라크장군은 6.25전쟁에 자기아들을 보냈고, 워커장군은 아들과 함께 참전했다가 자신의 목숨을 잃었다.

6.25는 이처럼 한민족안에서 서로 싸우고 핡키며 피흘렸던 전쟁으로 인민군이 낙동강 까지 내려오기도 했고, 우리 국군이 압록강까지 올라가기도 했지만 결국은 3년만에 휴전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니까 6.25는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했다고는 딱잘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떻게보면 무승부의 전쟁이었던 것 같고 또, 결말을 맺지못한 전쟁이었다고 하겠다.

그후로, 비록 휴전은 되었지만, 지금껏 남북으로 서로 대립과 긴장으로 적대감이 계속 되어가는 비극의 전쟁은 끝나지 않고 있으며 아직도 수많은 전우들이 적의 총탄에 쓰러진채 이고지 저 능선 조국산천에 있는 영혼들이 가족의 품을 기다리다 잠들고있는 것이다.

현재 생존해있는 6.25참전 노병들은 이제 80대 나이를 훌쩍넘어 90대 나이로 날로 쇠약해가고 질병에 시달리면서 남은여생 길어야 몇 년이다. 해가갈수록 저세상으로 떠나는 노병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전적지 장사리해변가엔 전몰용사 위령탑이 세워져있다
전적지 장사리해변가엔 전몰용사 위령탑이 세워져있다

끝으로, Noblesse, Oblige란 프랑스어로 높은 사회신분에 적용하는 도덕적의무를 뜻하는말로 (고귀한신분(귀족)이요,책임감)이 있다는말이다 영국황실은 오래전부터 군복부의 전통을 갖고 있으며 이스라엘에서는 병력기피 스캔들이 없다한다. 남녀18세가 되면 군에 입대한다.

남자는 3년 여자는 21개월의 의무복무기간을 마쳐야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느 어떠한가? 전직대통령과 장차관 고위공직자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그리고 대기업사장등과 그의 자식들을 대상으로 군복무 여부를 조사해보면좋겠다.

참전용사와 무공훈장을 받은 이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았는가? 나라위해 생명을 마쳤지만 그 유해도 찿지못한 무명용사들의 가정을 얼마는 돌보고있는가? 우리 국민모두가 수많은 호국영령들의 희생위해 세워진 이나라에서 평안이 살고있음에 대해 보훈의 달을 맞아 한번쯤더 국가를 생각해봐야할 것이다.

장사리상륙작전 영웅 이인수 목사, 서울 둔촌동소재 한국보훈병원 입원 교회협동신문 임원 김한수 목사, 강영철 목사(좌), 한국보훈병원원목 김경수 목사(우) 병문안하고 있다.
장사리상륙작전 영웅 이인수 목사, 서울 둔촌동소재 한국보훈병원 입원 교회협동신문 임원 김한수 목사, 강영철 목사(좌), 한국보훈병원원목 김경수 목사(우) 병문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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