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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의 조명Ⅵ] 한반도의 분단과 모스크바 외상회의(外相會議)
[한국 근대사의 조명Ⅵ] 한반도의 분단과 모스크바 외상회의(外相會議)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21.05.24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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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영 목사 칼럼
윤대영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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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24일 소련군이 38선을 기점으로 민간인들의 남북교류를 막기 시작하면서 38선이 경계선이 되었다. 이로 인해 남한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자 미국은 하나의 통일된 정부를 만들고자 소련에 여러 차례 연락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소련은 무응답으로 일관하였고 이에 미 국무성은 38선 문제를 1945년 12월 모스크바 외상회의에 제기하였다.
종전 직후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은 4대국의 공동신탁통치를 통해 분단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38선을 경계로 왕래가 막혀 남한에 석탄 문제, 전기 문제, 교통 문제 등 상황이 심각해지자 미 국무성은 한반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조속한 시일 내에 공동신탁통치로 전환되도록 회의가 즉시 개최되어야 하며 회의를 완료할 때까지 앞으로의 공동신탁통치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양군 사이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선”을 폐지하기 위해서 소련은 즉각적인 조처를 해야 함을 전하였다. 한편 소련은 이미 38선 이북을 점령하고 있었다. 소련에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계획 반절을 달성한 상황이었고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고자 기회를 엿보는 상황이었다. 미국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제안을 하지 않으면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미국은 소련이 회의에 꼭 참여해야만 할 끈이 필요하였다. 이것이 루즈벨트와 스탈린이 맺은 약속 즉, 4대국에 의한 공동신탁통치이다. 미 국무성은 공동신탁통치를 매개로 하여 38선 문제를 모스크바 외상회의에서 해결하고자 하였다.
모스크바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할 때, 한국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신탁통치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일본에게 신탁통치 36년 당한 것만으로도 억울한데 미국과 소련이 신탁통치를 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자 국민들은 신탁통치는 제2의 식민지 운동이라며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 일어나자 미국은 공동신탁통치하려고 계획하였던 것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소련을 끌어들이려면 공동신탁통치에 관한 회의를 진행해야만 하였다. 왜냐하면 미국과 소련이 맺은 약속을 핑계 삼아 회의를 진행하여 미국의 목적대로 38선을 폐지하게 된다면 남북한의 왕래가 자유로워질 것이고 이를 통하여 민주주의 사상이 북한에 가게 되어 소련이 이미 차지하고 있는 북한마저도 소련이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외상회의를 참여한 미국과 소련은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채 회의에 참여하였다. 미국은 지속적으로 소련에게 요구하였던 한반도의 통일을 다시 강조하는 의제 단 하나를 들고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주일소련대사 말리크(Yakov Alexandrovich Malik)가 쓴 문서에 따르면 소련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자주적이고 독립정부를 만드는 것이며 이 정부가 바로 인민 정부였다. 미국이 하나의 통일된 정부를 만들고자 하는 내용에 관하여 미국 정면에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소련이 원하는 정부를 만들고자 노력해야 함을 기록하였다.
12월 16일 시작된 모스크바회의에서 “독립한국정부의 수립”(The establishment of an independent Korean Government)을 “독립한국정부의 수립을 위한 한국의 통일행정부의 창립”(The creation of a unified administration for Korea looking for the establishment of an independent Korean Government)으로 의제를 수정하였다. 이유는 먼저 민간행정부를 만들어서 미국과 소련이 함께 상의한 후 한국 정부를 만들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어 진행된 12월 17일 모스크바회담에서 미국 국무장관 번스(James F. Byrnes)는 신탁통치의 원칙에 관한 동의와 즉각적인 한국의 통일 행정부의 수립에 대한 제안하자 소련 외상(外相) 몰로토브는 논의할 시간을 요청하였다. 12월 18일 모스크바회담이 속개되었으나 몰로토프가 연기를 요청함으로 20일에 다시 회의가 진행되었다. 몰로토프는 급박한 문제(남북교류)와 그렇지 않은 문제(신탁통치와 임시정부) 구분하여 회의를 진행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전자는 예비회담을 통해서 실무자에게 맡길 것을 제안하였고 후자는 전자보다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미국의 통일행정기구 주장에 소련은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닌 한국의 좌익 정당과 단체들이 중심이 된 인민정부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소련은 미국의 제안을 역이용하여 자신의 임시정부(인민위원회) 수립 제안을 관철하였고 미국의 38선 철폐 주장을 회의에서 즉시 결정할 것이 아니라 석탄, 전기, 교통의 전문가에게 맡겨야 함을 강조하며 미국의 계획을 무력화함으로 회의가 결론지어졌다. 트루먼 대통령은 국무장관 번스가 오만하게 의논조차 하지 않고 한국의 문제를 결정하고 귀국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가 귀국하자마자 집으로 불러 지나치게 유화책을 썼다고 비판, 강하게 질책하였다. 번스 국무장관은 38선 철폐라는 미국의 목표를 실패한 것도 모자라 너무 많은 것을 소련 측에 양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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