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욱 목사 동천교회 담임
지난 한 주간(週間) 동안에도 주님의 은총(恩寵) 가운데 평안(平安)하신지요?
신동욱 목사입니다.
오늘이 3월25일 수요일입니다.
춘분(春分)이 지난지도 닷새가 되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氣溫)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산(山)기도 올라갈 때의 저의 복장(服裝)도 패딩점퍼를 벗어버리고 얇은 봄·가을용 파카로 바꿔 입었습니다.
교회(敎會)마당에 산수유(山茱萸) 꽃이 먼저 피었는데 하늘과 가까운 나무꼭대기부터 목련(木蓮)꽃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4월로 들어서면 4일이 청명(淸明)이요, 5일이 한식(寒食)인데 매화(梅花)와 개나리가 피지 않을까 싶습니다.
19일이 곡우(穀雨)인데 4월중에 벚꽃 , 살구꽃까지 다 만개(滿開)할 것 같습니다.
본격적(本格的)인 꽃 시절(時節)이 왔습니다.
이곳 남양주시 화도읍은 서울과는 많이 차이(差異)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책 몇 권 구입(購入)하러 서울에 갔는데 이미 목련꽃이 만개(滿開)해 있더군요.
나라 문제 때문에 꽃을 기다리고 감상(感傷)할만한 여유(餘裕)가 없습니다만, 옛날 중국의 시인(詩人)들은 이때쯤이면 소위 사군자(四君子) 중의 첫 번째 꽃인 매화(梅花)를 노래하느라 여념(餘念)들이 없습니다.
지난주(週)에도 청(淸)나라시인 이방응(李方膺)의 제화매『제화매(題畫梅)』를 소개(紹介)했습니다마는 또 그 전(前) 주(週)에는 역시 청나라시인 운수평(惲壽平)의 매화도(梅花圖)를 소개했었습니다.
오늘은 역시 청(淸)나라시인 「옹조(翁照)」의 『매화오좌월(梅花烏坐月)』이란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매화오』란 『매화가 핀 언덕』을 말함인데 직역(直譯)하자면 『달 밝은 밤에 매화가 핀 언덕에 앉아』라고 번역(飜譯)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자(譯者)는 그냥 『달밤』이라고 번역하고 있군요. 그 내용(內用)은 이렇습니다.
『달 밝은 밤 조용히 앉아
홀로 읊조리는 소리에 서늘함이 출렁이네
개울건너 늙은 학(鶴)이 찾아와
매화꽃 그늘을 밟아 부수네』
아직은 밤공기가 차가운 계절인데 홀로앉아 시를 읊조리는 시인의 모습이 연상(聯想)이 됩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하얀 학이 나타나 성큼성큼 매화 그림자를 밟고 있는 모양(模樣)을 매화그림자가 부서진다고 표현(表現)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자가 밟는다고 부서질리야 있겠습니까마는 천재적(天才的)인 시인의 감수성(感受性)이요, 매우 감각적(感覺的)인 표현(表現)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재적인 문학적(文學的) 감성(感性)과 절륜(絶倫)한 감각도 마음의 여유(餘裕)가 있을 때 일입니다.
나라가 사정없이 공산화(共産化) 되고 있는데 어찌 이러한 문학적인 유희(遊戲)와 감각적인 유락(遊樂)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오직 절박(切迫)한 심정(心情)으로 전능(全能)하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祈禱)할 뿐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것은 저 용(龍)의 나라, 사탄의 나라, 새로운 공산주의(共産主義) 종주국(宗主國) 중공(中共)이 세균전(細菌戰)을 하는 것도 모자라 미국(美國)이 진원지(震源地)라는 터무니없는 선전(善戰)을 하고 있는데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가증(可憎)한 좌파정권(左派政權)은 그러한 사탄의 나라 중공을 친구(親舊)라고 호칭(呼稱)하면서 어려울 때 돕는게 진정(眞情)한 친구라고 말 같지도 않은 가증한 소리를 지껄이더니 이제는 그 중공을 본(本)받아서 이 중공폐렴, 사탄 바이러스의 진원지요, 숙주(宿主)인 중공인민(人民)을 입국(入國) 금지(禁地)시키는 초동대처(初動對處)를 하지 아니하고, 경제적(經濟的)으로 타격(打擊)을 받느니 어쩌니 하면서 계속해서 중공인민들을 입국시키고 있어 확진자(確診者)가 9천명이 넘고, 사망자가 100명이 넘게 된 이 상황(狀況)에 절대적(絶對的)인 책임(責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천지(新天地) 폐렴이니 대구(大丘)폐렴이니 하고 책임전가(責任轉嫁)를 하다가 이제는 일치(一致)해서 우리 기독교회(基督敎會)에 책임이 있는 양 선전(宣傳)·선동(煽動)하고 있고 예배(禮拜)를 탄압(彈壓)하고 있습니다.
중공폐렴 이전(以前)의 경제실정(經濟失政)이나 공산화를 위한 무법(無法)·불법(不法)한 모든 가증한 일은 덮어두고 오직 중공폐렴을 놓고 진원지인 중공을 옹호(擁護), 두둔(斗頓)하다가 오히려 그러한 사태(事態)를 악용(惡用)하여 사악(邪惡)한 공산화 공작(工作)의 최후(最後) 최강(最强)의 저항세력(抵抗勢力)인 교회를 말살(抹殺)하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목사(牧師)님과 성도(聖徒)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진리수호(眞理守護),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 수호를 위하여 분연(奮然)히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대형(大型)교회들과 각(各)교단(敎團)의 총회(總會)들은 정부(政府)의 정책(政策)에 순응(順應)해야한다고 하면서 알아서 공예배(公禮拜)를 폐(廢)하고 있는 실정(實定)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로부터 더 큰 징계(懲戒)·징벌(懲罰)·심판(審判)을 받지 아니할까 걱정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이 나라 이 백성(百姓)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이제 해석 530신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오늘 해석(解釋)할 말씀은 삿1:21~36절까지입니다.
해석 제 529신에서 여호수아 선지자님의 사후(死後)에 이스라엘 자손(子孫)이 여호수아 선지자(先知者)님의 유언(遺言)에 따라 가나안의 미(未) 정복(征服)지역(地域)을 정복하기 위한 전투(戰鬪)에 나서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命令)대로 유다지파(支派)가 먼저 전투에 나서게 되었고, 시므온 지파가 유다지파와 함께 협력(協力)해서 싸우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지파와 함께 하셨으므로 유다지파는 예루살렘을 쳐서 취(取)하여 칼날로 치고 성(城)을 불살랐으며 헤브론을 쳐서 취하였고 드빌을 쳐서 취했습니다.
그러나 산지(山地) 골짜기의 거민(居民)들은 철병거(鐵兵車)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이후(以後) 다른 지파들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 선지자님을 통(通)해서 나누어 주신 지역(地域)을 정복(征服)하기 위하여 전투하게 됩니다.
요셉 족속은, 벧엘을 치러 올라갔고 여호와께서 요셉족속과 함께 하시므로 벧엘을 정복(征服)했습니다.
므낫세 지파는, 벧스완과 그 향리(鄕里)의 거민(居民)과 다아낫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여 가나안 사람들이 결심(決心)하고 그 땅에 거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강성(强性)한 후(後)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使役)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에브라임지파도 게셀에 거(居)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 들 중에 거하였습니다.
스블론 지파도 기드론 거민과 나할롯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습니다.
아셀지파도, 아셀거민과 시돈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습니다.
이는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납달리 지파도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했습니다.
단 지파는,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 들이고 골짜기로 내려오기를 용납(容納)지 아니하고 결심(決心)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하였더니 요셉족속(族屬)이 강성하매 아모리 사람이 필경(畢竟)은 사역을 하였습니다.
아모리 사람의 지계(地界)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그 위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사기의 기록은 이스라엘 지파들이 실패하는 장면들을 군데군데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낼 수 없었음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대적을 이스라엘 손에 붙이셨기 때문입니다(수21:43~45)
이와 같이 된 까닭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전히 복종하지 아니하고 힘써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려하지 않은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를 통해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선민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첫째, 하나님은 선(善)을 행하신다.
둘째, 이스라엘은 배교(背敎)한다(삿2:12).
셋째, 하나님은 징벌(懲罰)하신다(삿2:14)
넷째,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삿3:9)
다섯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 뜻을 돌이키신다(삿2:18)
사랑하는 일열낭독운동회원 여러분!
예(舊)나 지금이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의 관계는 위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내용을 반복한 관계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위경(危境)을 당한 우리 대한민국의 교회도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절히 기도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의 부르짖음도 들으시고 용서(容恕)하시고 뜻을 돌이키실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할렐루야! 주후 2020년 3월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