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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선 박사와 목회 - 박근상목사 (신석교회 담임, 편집자주 미주노회 김치선포럼 발췌)
김치선 박사와 목회 - 박근상목사 (신석교회 담임, 편집자주 미주노회 김치선포럼 발췌)
  • 강영철 기자
  • 승인 2020.02.26 2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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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선교사로서의 김치선
박근상목사(신석교회 담임, 명예총회장)
박근상목사(신석교회 담임, 명예총회장)

김치선 박사는 1899년 8월 10일 김영준씨와 최현숙 여사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8년 2월 24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김치선 박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원한 쉼을 누리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김치선이 남대문교회에서 어떠한 사역을 하였으며,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김치선이 선택했던 결정과 복음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박태선과의 관계를 갖게 되는 과정과, 김치선이 일본에 있는 동안에 재일교포를 위하여 어떠한 선교사역을 하였는지를 살펴보려한다.

제 1장 남대문교회와 김치선 목사

1944년 5월 일본에서 돌아온 김치선 목사는 서울에 있는 남대문교회의 제 6 대 목사로 청빙을 받게 되었다. 당시 남대문 교회는 교통이 원활한 서울역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장로교가 합동과 통합으로 갈리기 전에 전국에서 영락교회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였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선생이 자주 출석하기도 했다. 손양원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시고 300만 구령운동을 남대문 교회를 중심으로 일으켰다. 김치선 목사님은 부임하면서부터 새벽기도회를 계속하였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홀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였다. 김치선 목사는 이 교회에 부임한 뒤부터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1944년 당신의 상황에서는 무척이나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교회들에서는 새벽기도회를 쉬고 있었는데 김치선 목사는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이 서울에서는 처음 시작된 새벽기도회였다.

김치선 목사는 그 암담하고 어수선한 시기에 매일 새벽제단을 쌓으며 강단에서 엎드려 민족을 위하여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는 매 새벽기도 때마다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그리고 이 민족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때부터 그를 조국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국의 예레미야'라고 불렀다.

김구 선생은, 김치선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던 남대문 교회의 교인이었다. 따라서 김구 선생과 김치선 박사는 각별한 사이일 수밖에 없었다. 김구 선생은 매 주 한 번씩 김치선 박사를 집으로 초청하여 예배를 드리고 김치선 목사와 신앙적인 교제를 나누었다. 또 그의 아들 김신(金信)씨의 결혼식 때에도 그 주례를 김치선 목사에게 부탁하였다. 열심 있는 기도와 은혜로운 설교로 인하여 남대문 교회는 점점 그 교세가 확장되었고 마침내 남한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해방된 기쁨의 눈물, 자기 과거에 대한 회개의 눈물, 우리 민족을 향한 구원의 문제, 한국이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남대문교회는 귀환 동포들의 안식처이자 소식이 끊어진 친지들의 행방을 알 수 있는 곳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서울역에서 내려 찾아드는 그들에게 교회는 뜨락에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허기진 배를 채워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고 있었다. 김치선 목사가 남대문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삼백만 부흥운동을 전개하고 이만팔천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다. 그의 남대문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박태선장로와의 관계는 그의 지도력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하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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