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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게 문제가아니라 어떻게사느냐가 문제다”
“사람이 사는게 문제가아니라 어떻게사느냐가 문제다”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20.01.3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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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무대요 인간은 배우다, 주어진 운명은 각본이며 삶의 방법은 연기다(세익스피어)”
이인수목사 전)온누리수련원장
이인수목사 전)온누리수련원장

우리 모두가 공평하게 또다시 1년 365일을 선물로 받았다. 

어떻게 자신이 사느냐에 따라서 12월에 가서는 결과가 확연하게 드러날 것이다. 최선을 다해 후회하는 1년이 아니라 ‘참 잘살았다’고 자부할수있도록 하루하루 알차고 보람있게 사용해야하겠다.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해도 이와 똑같은 삶을 살 것이다(처어칠)

이처럼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았다고 하는 증거일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같혀 있던 당시 70세의 고령인 소크라테스는 그에 친구인 크리톤이 감옥에 찿아와 탈옥할 것을 권고했으나 소크라테스는 ‘사람이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 가 귀중하다면서 거부하고 옥에서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고한다.

아라비아의 유명한 의사였고 성경번역가인 후나인이분이이스하크는, 아라비아의 최고 정치가인 무타와킬의 시의로 있을 때 정치적인 원수를 죽이기 위해 독약제조를 명령받았으나 그는 의술이나 학문은 다른 사람의 복지를 위해 선하게 쓰이는것이지 배움의 해를 가하는데 쓰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허락지 않으셨다면서 누구든지 남에게 해를 주는이는 또한 자기가 다시금 해를 받도록 되어있것이 철측인즉 내 어찌 그 명령을 듣겠느냐면서 명령을 거부하고 그 자리를 사임했다고 한다.

그래서, 현철은 말하기를 첫째로, 천명(天命)을 두려워하라했고 둘째로 위인과 역사의 가르침을 지키며 두려워하라 했으며 셋째로, 성인들의 말씀인즉 진리를 두려워하라 했던 것이다.

사람이 한생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없이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생살이 그 자체가 문제와 더불어 살면서 문제와의 씨름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독일의 시인 쉴러는 고통이 인생이라했다.

고통을 밑받침하지 않는 성과란 토대없이 세워진 집과 같아서 언제 허물어질지 모른다.

성경에,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평강의 한 열매를 맺나니(히12:11)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마음을 사로잡고 인생살이를 좌절케 만드는 심리적 요소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세가지를 든다면 열등감과 두려움, 그리고 실패감이다. 이 세가지를 해결하지 않고는 어떤일도 개척해 나갈수가 없고 새로운 희망이나 새로운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말라, 염려하지말라, 이말씀이 신구약성경전체를 통해서 360여회나 나오고 있다. 360회의 숫자는 우리에게 매일 한번씩 마음속에 새기며 살아가라는 그러한 상징적인 의미를 찿아볼수있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이 그래서 인간의 99%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다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한다.  열등감 또는 열등의식이란 정의를 한다면 자기의 존재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자학증세라고 한다.

신체적 어떤 결함이 있다거나 정신적 또는 질적으로나 기능면에서 약점이 있던지 가정생활과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고 타인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거나 미움을 받는다던가 실수나 실패한일이 있던가 이러한 문제에 연결해서 다른 문제까지도 염려하게되는 그런 어떤 패배감을 가지데서 오는 열등의식이 있다. 이러한 열등의식을 제대로 극복못하면 아무런 새로운 결단도 새로운 삶도 살수가 없다.

반면에 그러한 열등의식을 극복해 나간사람들이 훌륭한 역사의 자취들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서 볼수가 있다.

예를 들어, 전 미대통령 루즈벨트는 소아마비로 하반신 장애자였고 세계적인 음악작곡가 베토벤은 청각장애자였으며, 미 전대통령 링컨은 초등학교 졸업도 못한 무학자였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그러한 열등의식속에서도 훌륭히 극복해내고 성공한 사람들이다.

반대로,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인간은 거짓되고 자기가 아닌 다른 인간으로 살게되고 인격파탄으로 어쩌면 그렇게도 비 신앙적 요소들로 가특차 있는지 놀랄정도다. 대표적인 증상에서보면 첫째로, 열등의식을 가지 사람일수로고 가면으로 자기의 열등의식부분을 감추려하고 오히려 과도하게 다른 부분을 과시하려한다. 둘째로,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하고 도피적인 생활을 하려한다. 현실상황이 또는 주변환경과 사회가 자기마음에 맞지않으면 ‘이 빌어먹을 세상’ 하면서 함부로 욕을 하거나 엉뚱한 생각을 하게한다.

셋째로, 남을 잘 비판한다. 남에대해 말할때엔 꼭, 헐뜯거나 깍아내려야 만이 직성이 풀린다. 넷째로, 별거아닌 일에 필요이상의 신경을 쓴다. 대수롭지 않은 말한마디 들은 것 때문에 밤잠을 못자거나 소화도 못시키는 사람들이다. 신경과민성다.

다섯째, 자기잘못을 시인하기 보다는 변명을 잘한다. 어떤일이 생기면 ‘네탓이요라고 하지만, 내탓이요’ 라는 말은 못한다.

여섯째, 의욕을 상실하고 체념적이 된다. 자기 약점에 집착한 나머지 그 약점과 연결된 분야인 다른 일까지 용기나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좌절하고 만다. 그럴수록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한다.

일곱째, 두려움이다. 성경요한1서4장18절말씀에, ‘사랑안에서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쫒을 수 있다’ 라는 말씀을 보면서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시골에서 순박하게 자란 처녀가 도시 총각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신앙으로 곱게 자란 처녀가 삭막한 도시로 시집가자니 두려움이 앞섰을 것이다. 마침 결혼식날이 토요일 오후였기에 그 시골 교회 목사님이 도시까지 가서 축하해줄순 없고해서 미리 그 처녀를 불러 기도를 해주고 그리고 결혼식날에는 축전을 보냈다. 도시로 시집가는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기에,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격려의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요한1서4:18 말씀으로 ‘축결혼 요한1서4:18 그리고 아무개목사’ 이렇게 축전을 보냈는데 전보를 타전한 우체국 직원이 요한1서4:18을 요한1자를 빼고 요한4:18 이렇게 보낸 것이다.

신혼여행중에서 신랑신부가 각지에서온 전보를 뜯어보는중 신부 고향 목사님이 보낸 축전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뜯어보니 ‘축 결혼 요한4:18’ 이렇게 적혀있다. 그래서 요한복음 4:18을 신랑하고 같이 읽어보니, 네가 남편을 다섯이나 가졌는데 지금의 남편은 네남편이 아니다. 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찻겠으며 어쩔줄몰라 당황한 신부는 그만 눈물만 펑펑쏟으며 울었다고 하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어떤 큰일이 부닺쳤을 때 하는말이 그게다 네팔자고 네운명이다. 라고들 말한다. 운명은, 우리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만들지 않는다. 다만 그 자료와 씨를 우리에게 제공할뿐이다. 프랑스학자 몽테에뉴는 사람이 생명은 인간의 힘으론 어쩔 수 없다. 병든 사람이 먼저 죽을지 건강한 사람이 먼저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운명인것이라했다.

이 알 수 없는 생명에 관한 것은 하나님께 맡길수밖에없다. 그런데 생명은 하나님께 맡길지라도 우리에 능력으로 할수있는일은 열심히 해야한다. 병에 걸리면 의사의 진단과 약을 먹어야하듯이 매사가 다 그러하다. 불행을 자초함이 없도록 자기 스스로 노력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밝은 희망을 가지면 저절로 열린 것이다. 그래서, 세익스피어는, 세상은 무대요 인간은 배우다 주어진 운명을 각본이며 삶의 방법은 연기라 했다. 즉, 인생사 모두가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이란 각본에 의해 삶을 연기하는 배우와 같다 하겠다.

불란서작가 빅톨위고가 쓴 글에서 사람은 일생을 두고 세가지, 싸움을 싸우면서 살고있는데 첫째는, 자연과의 싸움이고 둘째는 인간과의 싸움이며 셋째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했다. 위고는 지적하기를 인간이 자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때문에 자연을 개발해서 물질문명을 성취해왔고 그리고 인간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이기기 때문에 오늘날 나라는 인간이 생존해있다고 말하고 그런데, 싸우면 싸울수록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은 그야말로 비참하게 지는 싸움이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한다.

선뜻 생각해보면 이길수있을 것 같지만 제대로 이기지 못한다. 옛 성인의 말씀에 육체는 그 정신이 이끄는 노예라했다.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그 정신 상태에서 나오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좋은세상, 좋은사회는 좋은사람들이 만들어가고 있다.

끝으로, 이 세상에는 좋은사람, 나쁜사람, 추한사람 그리고 꼭 있어야 할 사람과 있으나마나한 사람, 있어서는 안될사람, 속담에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이말들은 그에 행동거지를 평가해서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인간생활의 실제에는 좋은 사람과 추한사람의 기준가치가 다양화 되어있다. 그 사람이 죽고난 뒤에야 그렇게도 훌륭한 일을 했던가 하고 감탄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생존시엔 추한 놈이라 취급당하던 사람이 죽고나서야 제대로 평가받기도 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엔 세상사람들이 우러러봤던 그런 사람도 죽고나서야 들통이 나서 추한놈 취급을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중국에 오래된 사서(史書)인 진서(晋書에) 쓰여진 글중에서 사람은 죽어 관뚜껑을 덮고난 후에야 그사람을 알수있다라고 했다.

당신도 좋은평가를 받으려거든 살아생전 좋은일 많이 하라는 말이겠다.

무아주재(無我主在) 나는 없고 주님만이 계십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것입니다(갈2:20)

“주님, 이제 나는 없습니다. 내안에 주님만이 계십니다. 앞으로 영원히 그렇게 살게합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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