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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선 박사와 대한신학 그리고 대신교단(3)
김치선 박사와 대한신학 그리고 대신교단(3)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20.01.0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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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주목사
대신대원대학교
김치선 목사
김치선 목사

1948년 8월에 야간 대한신학교를 남대문 교회에서 창설하였다. 초대 원장에 윤필성 목사가 취임하였고 뒤이어 1년 후에 김치선 박사가 취임하게 되었다. 

  북에서 넘어와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신학교였다. 이 학교가 대신 교단을 설립하는 모체가 된 것이다. 

  교단은 신학과 정치적 조직을 통해 형성된다. 그 신학을 형성하는 모체가 신학교이다. 신학교의 노선은 교단의 신학을 결정하는 뿌리이다. 구미의 역사가 그랬다. 신학교의 자유주의화는 교단의 멸망을 촉진하는 원인이다. 

  교회의 문제는 신학교의 문제로 연결된다. 신학교의 문제는 이사진과 교수들의 문제로 연결된다. 이사진과 교수들이 돈과 자신의 영예만을 위해 정치를 일삼을 때 신학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럴 때 학생들은 성경에 기초한 진실 된 신학을 배울 수 없다. 후에 그들이 나아가 남의 약점을 잡아 지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정치에 매진하게 된다.

   WCC 문제로 합동과 통합이 나누어지기 전에 대한신학교는 총회 야간신학교로 있다가 6.25를 맞이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대한신학교 식구들과 성도들이 서울로 복귀하였으나 김치선 박사는 남대문교회로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은 피난길에 이미 다른 목사가 와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김치선 박사는 창동교회를 목회하게 되었다.

  서울에 평화가 깃들고 신학교 학생들이 날로 늘어가게 되었다. 대한신학교 7회와 8회에 절정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때 졸업한 학생들이 졸업 후 교계의 각계각층에서 많은 일을 감당하게 되었다.

  1954년 김치선 박사는 기도에 열중하는 삶을 살기 위해 기도원 자리를 찾아 나섰다. 지금의 서울대 자리에 벧엘 기도원을 세웠다. 당시 필자도 시간이 나는 대로 관악산 벧엘 기도원에 찾아가 홀로 기도에 몰두한 적이 누차 있었다.  

   더불어 김치선 박사에게 닥친 환란은 겹치고 또 겹친 사건들이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그것은 대한신학교 건물과 한양교회(창동교회를 개명)의 화재,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이 수양회게 가서 7명이나  익사한 사건, 대한신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난 법적 다툼 등이었다.

   한양교회가 남산 2500평의 땅위에 세워진 일제 때의 신사(神社) 건물을 매입하여 교회와 학교로 사용하던 중 1956년 어느 날 새벽에 신학교와 한양교회가 전소된 화재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김치선 박사는 충격을 받아 병중에 눕게 되었다. 남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던 2500평의 땅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임시로 대형 콘세트를 세워 신학교와 교회를 함께 사용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속적으로 일어난 마찰이 있었는데 그것은 정부가 대한 신학교와 한양교회가 사용하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 벌린 소송이었다. 이 소송은 정부를 상대한 것이었으므로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9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모든 재산을 재판에 소모하고 말았다. 어디에 가서 정착할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 와중에 정부의 시책이 발표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의 신학교와 하나의 교단” 이라는 것이었다. 대한신학는 1952년 4년제 각종 대학교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의 교단과 관계를 가져야 할 형편이었다. 

  당시 대한신학교는 합동측 총회의 야간 신학교로 운영을 해 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단독 교단을 만들어야 할 형편이었다. 당시 근본주의 선두주자였던 ICCC의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박사와 연관을 맺고 1960년 성경장로회 라는 이름으로 교단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맥킨타이어 박사의 주선으로 소련 영사관이 사용했던 자리인 용산구 서계동 33-2의 건물을 매입하여 1962년부터 대한신학교가 사용하게 되었다.

  1966년 김치선 박사는 암스텔담에서 열린 ICCC 국제대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했다. 그것이 국제대회에서의 마지막 강단이었다. 잠시 미국에 들러 필라델피아 페이스 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에서 쉬고 귀국하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쓰러져 전신을 쓰지 못한다는 통보였다. 언어도 쉽게 구사할 수 없었고 대소변도 자유롭지 못했다. 머리에 혹이 생겨 미국에서 8시간이란 긴 수술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날로 쇠약해져 갔다. 

  이때 일본에 유학중이던 최순직 목사를 귀국하도록 하여 신학교를 돕게 하였다. 어느 정도 학교의 급한 일을 수습한 후에 다시 학업을 마치기 위해 일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급하게 25세의 젊은 나이로 김치선 박사의 외아들 김세창 박사가 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1967년 12월 21일 이사 최용찬 장로와 김세창 교장을 불러 마지막 회의를 주관했다. 1968년 2월 24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김치선 박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원한 쉼을 누리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김향주목사
김향주목사

김향주목사  - 안양대학교  졸업,    미국 Bible  Theological    Seminmary졸업(Th.  D),미국  Reformed  Theologica Seminmary졸업(Ed.D),  미국  Kernel University  조직신학교수  및  학장,  미국  Life  ChristionUniversity  조직신학교수 및 학장, 대신대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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