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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선 목사의 신학(2)
김치선 목사의 신학(2)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19.10.0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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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 김치선 목사
고봉 김치선 목사
고봉 김치선 목사

 

김의환 박사는 “칼빈주의자는 근본주의를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근본주의자는 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증경 총회장 김재규 목사는〈김치선 목사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총 130여 편의 설교 중 묵시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계시록, 다니엘서는 한 번도 설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통 혼란기에는 종말론 사상이 유행하였는데 반해서 시류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고 계셨음이 분명하다. 이는 그 분의 신학 사상이 세대주의적 신학의 경향을 지닌 달라스 신학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메이첸이 주도하고 있었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자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김치선 박사는 평양신학교와 일본 고베중앙신학교와 미국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하는 메이첸의 영향을 받은 신학으로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성경을 절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경적 보수주의신학이라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1.1. 민족구령의 열정

  김치선의 신앙은 10살 때 결신 이후, 이 성숙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의 신앙은 정말 말 그대로 초지일관의 신앙이었다. 그는 학창 시절에 3.1 운동에 직접 참여하는 경험과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육받는 동안에 나라를 잃은 설움과 민족독립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또한 일본에 건너가서 영재영의 선교활동을 도우며 일본에 건너가 있던 조선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선교활동을 통하여 조선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각성하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고 복음전파를 통한 민족사랑의 정신을 더 깊이 간직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신앙은 결국 귀국 후, 남대문 교회에서의 목회에서 뿐만 아니라 현 안양대학교의 전신인 대한신학교의 설립과 운영, 창동교회 개척, 한양교회 목회, 청파중앙교회 개척 등 목회와 신학 교육에 그대로 나타났다. 특히 영혼을 사랑하는 그의 뜨거운 신앙은 해방 직후 혼란의 상황 속에서도 「300만 부흥 전도회」를 창립하여 3천만 민족의 십일조인 300만 국민이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 교육의 실천 덕목도 바로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2만 8천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는 것이었다.

  김치선은 신학교를 통해서 철저한 성경 중심의 정통신학을 수립하려고 노력했으며 졸업생들로 하여금 그러한 신학사상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은 반드시 영혼을 향한 뜨거운 전도로 나아가야 할 것을 계속적으로 외쳤다. 이처럼 김치선이 뜨거운 신앙과 영혼 구령의 열정을 가지게 된 것은 일찍이 그가 그의 고향인 함경남도 흥남읍 서호리의 서당에서 만난 스승인 김응보 영수의 순박한 신앙과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인 영재영 목사 밑에서의 철저한 훈련이 그 배경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히 11장 38절)라고 그의 묘비에 적힌 성구가 그가 일생동안 품었던 신앙이 어떤 신앙이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2. 김치선목사의 사역

  1944년에 김치선은 일본에서 귀국하여 남대문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서 가장 혼란한 시기에 전국적인 선교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남대문 교회를 중심으로 기도, 회개, 전도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당시의 김치선의 신념에는 조국해방을 맞이한 이 민족의 살 길은 오직 기도와 회개와 전도뿐이라는 생각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2.1. 기도운동

  해방후 김치선 목사의 뜨거운 전도와 말씀의 능력은 남대문 교회로 하여금 부흥의 가속을 촉진시켰으며 따라서 교회 전체가 활기차게 전도를 실행에 옮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국은 격변기를 격고 있었고 참으로 어수선한 시대였다. 교계에서는 신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아직 없었고, 교회가 시작 된지 불과 몇 십 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이렇게 시대적으로나 영적으로도 어려운 시국의 상황에 처한 김치선은 계속적으로 새벽기도를 강행하였다. 조국의 해방 이후에 남한 땅에서의 새벽기도의 시발점은 남대문교회였다. 그는 기도하기 위하여 자기의 좋은 집을 불리하고 문제가 많은 집과 바꾸고 2층을 기도실로 정하고 겨울에는 북풍이 휘몰아치는 방에서 외투 하나 걸치고 기도하다가 그 자리에서 자고,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자기와 이 민족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회개하며 또 회개하며, 전도하고 또 전도하였다.

  김치선의 딸인 김동화의 증언에 따르면, 김치선은 당시 서울 장충동에 살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울역 앞까지 매일 걸어서 새벽기도회에 가실 정도로 목회하는 데에 생명을 다 바쳤다고 한다. 그리고 낮에는 심방과 교회의 여러 행사로 인해 밤늦게 집에 들어왔다고 한다. 또한, 김동화의 증언에 따르면 김치선은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매일 마다 홀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했는데, 그 눈물에 섞여 있었던 것들은 해방된 기쁨의 눈물, 자기 과거에 대한 회개의 눈물, 우리 민족을 향한 구원의 문제, 특히 일찍부터 그의 기도 제목은 대한민국이 조국의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즉, 그 당시 우리 백성은 3천만이었는데, 우리 민족의 십분의 일인 3백만을 하나님께 바치자는,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2만 8천 여 동네에 가서 교회를 세워야 했으며, 그것을 목표를 두고 김치선은 매일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또 이것을 이룩하려면 신학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주일 강단에서 설교 할 때마다 “이 민족 삼천 만”이란 말을 늘 외치면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김치선은 당시 유명한 민족의 지도자였던 김구를 만나게 되었다. 김구는 독립운동가였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힘써온 유력한 지도자였다. 그는 20대 초에 불교에 귀의하였으나 거기서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드디어 28살 때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그 후로 그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민족을 향한 사랑이 한 영혼에서 나오는 두 줄기 우렁찬 샘물과 같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김구는 해방 직후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 자격으로 환국한 후에 자신의 거처인 경교장에서 새벽마다 기도회를 열었는데 단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비록 광복은 되었으나 미국과 소련에 의해서 조국이 둘로 나눠지게 되었으니 이것을 바라보며 분통을 이기질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찰나에 김구는 김치선을 새벽마다 초빙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어서 겨레의 안위를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김치선은 이 새벽기도회에서 온 우주 만물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겨레에 진정한 통일의 날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기도드리기 시작하였다.

2.2. 회개운동

  김치선은 실로 한국교회의 기도운동과 부흥운동의 아버지였다. 그는 매일 새벽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성령이여 강림하사’(찬190장)찬송을 부르며 성령의 은혜를 사모했고, 2만 8천 여 동네에 우물을 파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다.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김치선 박사는 전국으로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김치선은 자신이 과거 일본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을 때에 신사참배를 했던 것을 인정하고 그 내용을 설교를 통해서 교인들에게 선포하며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기도 하였다. 그는 12시만 되면 신사참배에 대해 회개하며 민족을 위해 기도하였다.

2.3. 구령운동

그 당시 남대문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전도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는 수요일 기도 후에는 교회의 청년들을 위하여 신앙강좌를 개설하고 청년신앙운동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매우 좋은 효과를 가져왔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서 청년들에게 신학교육을 시켜서 전도대를 조직해야 겠다는 굳은 결심을 김치선 목사로 하여금 하게 만든다. 김치선은 기도를 하면서 남한을 진정한 민주국가로 만들려면 이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변화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먼저 이 민족의 십분의 일이 하나님을 믿어야만 된다고 결심하여 마침내는 ‘삼백만부흥전도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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