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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인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스승 고봉 김치선박사
대신인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스승 고봉 김치선박사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19.10.06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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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 김치선 박사는 ‘한국의 예레미야’로 불릴 만큼 우리 대신교단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와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신 목사요, 신학자요, 부흥운동가였다

 

대신교단 설립자 고봉 고 김치선목사
대신교단 설립자 고봉 고 김치선목사

1. 서론

  고봉 김치선 박사는 ‘한국의 예레미야’로 불릴 만큼 우리 대신교단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와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신 목사요, 신학자요, 부흥운동가였다.
본 소고는 대신교단의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김치선 박사의 생애와 신학과 사상 그리고 사역들을 고찰해 보면서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 아무런 대안없이 혼란과 분열 그리고 다툼으로 어른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교회와 대신교단의 바른 정체성을 확립하는 차원에서 대신인이 먼저 알아야 하고 한국 교회가 모두 알아야 할 우리의 스승이신 고봉 김치선 박사에 대하여 알아보자.
 
2. 고봉 김치선 박사의 생애

2.1. 출생과 성장
  고봉 김치선 박사는 1899년 함경남도 흥남읍 서호리 바닷가의 작은 어촌에서 어촌 부호의 아들인 부친 김영준과 모친 최현숙 사이에서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에 의해 비교적 일찍 기독교가 전해진 곳이다. 김치선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일찍부터 서당에 다녔는데 서당 선생은 김응보 영수로 기독교가 처음 서호리 마을에 들어왔을 때 누구보다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신앙가였다.

  김치선이 14세 때 그의 조부의 어선 40척이 폭풍에 휩쓸려 김씨 가문이 파산하게 되었고 부친인 김영준은 할 수 없이 살길을 찾아서 가족을 거느리고 머나먼 장진 땅에 화전민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 화전민으로 떠나는 치선을 붙잡고 못 떠나게 한 사람이 영수인 김응보이다. 김응보는 영특한 치선을 화전민으로 보낼 수 없었다. 그는 치선을 함흥의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인 영재영(Luther Lisger Young)목사에게 소개했고 이때 김치선은 그의 믿음의 아버지요, 후견인이며, 평생의 은인인 영재영 목사를 만나게 된다. 그 후 치선은 영목사의 가정의 제반 일을 맡아서 하게 되었고 그의 사역에 동참하여 열심히 봉사하였다. 그와 동시기에 치선은 미션 스쿨이었던 영생 중학교를 졸업하고 영생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함흥지역의 비밀 학생 대표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던 치선은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간을 가졌으며, 더욱이 그는 이 수감생활 속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 발견과 함께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고 출옥 후에 목사가 될 것을 결심한다. 1922년 23세의 나이로 영생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치선은 서울로 유학 와서 연희 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해 영문학을 공부한다.   
  
   
2.2. 신학교시절
  1926영 28세의 나이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김치선은 목사기 되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년 후 그는 영재영 목사의 뜻에 따라 평양신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중앙신학교(현 개혁파신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했다. 고베중앙신학교의 성격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표명하고 있는 역사적 개혁파 신학을 견지하며 전도에 대한 실천과 관계있는 신학을 연구하고 교수와 학생 사이에 국적을 초월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신앙의 정절을 굳게 지켜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김치선은 고베중앙신학교를 통하여 역사적 개혁파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1930년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한 김치선은 32세에 목사안수를 받고 영재영 목사의 권유로 미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미국의 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프린스톤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마저 성서고등비평 이론을 도입하는 등 소위 좌경화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이로 인해 신학적 입장이 다른 두 파가 프린스톤신학교 안에 형성되어 있었는데 메이첸(Machen)을 중심으로 하는 구파와 좌경화된 신파가 갈등구조를 이루어 있었다. 결국 메이첸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교수퇴진과 함께 8명의 교수들이 필라델피아로 가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를 세우게 되었다. 영재영 목사는 김치선의 유학 대상학교로 바로 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선택했다. 김치선은 1931년 학교설립 3년째로 아직 모든 것이 안정되지 않았지만 정통신학의 계승과 전승이라는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세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김치선은 35세 되던 1933년 5월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석사(Th.M)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취득한 후 1934년 9월에 달라스 신학교(Dollas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여 1936년에 모세오경에 대한 연구로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았다.     

3. 김치선의 신학과 사상

3.1. 개혁파신학
  혹자는 김치선을 근본주의자라 한다. 그가 완전 축자영감설,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지옥의 실재성, 사탄과 귀신의 실재성 등 전통적 기본 교리를 역설하는 것 외에, 사회복음의 부당성, 각종 자유주의자들로 부터의 분리를 주장, 자유주의자들의 과학과 신학의 통합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강력한 믿음, 천년왕국설에 기초한 종말과 재림에 대한 확신, 그리고 자유주의적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그를 근본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김치선의 신학을 객관적으로 볼 때 근본주의적 요소는 있어도 근본주의 신학은 아니다. 반면 김치선을 세대주의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 이유는 김치선이 박사학위를 취득한 1936년대의 달라스신학교의 신학이 근본주의가 아니고 무디성서대학(Mooddy Bible Institute)과 Biola(Los Angels Bible Institute)와 필라델피아성서대학(Philadelphia Bible Institute) 등과 함께 세대주의 입장에선 신학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 사상은 오늘처럼 한마디로 규명하기 어려운 시기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적 흐름이 그러했듯이 포괄적 의미에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로 대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근본주의를 개혁파 신학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지만 근본주의는 개혁파신학은 아니다. 개혁파신학에 근본주의적 요소가 있을 뿐이다.

  김치선은 달라스 신학교에서「모세 오경에 관한 연구」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순직은 김치선에 대해 “근본주의 정신을 표방하여 자유주의와 대결했다.”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치선이 쓴 논문의 참고문헌을 대부분 개혁주의성향의 문헌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를 세대주의자나 근본주의자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김치선의 신학과 신앙에 결정적 계기를 형성하게 한 영재영 선교사, 평양신학교, 일본 고베중앙신학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도 역시 근본주의와 거리가 멀다. 미국의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과 정통 프린스톤 동료들은 “근본주의”라는 칭호를 싫어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이 볼 때 메이첸(Machen)이나 벤틸(Van Til)이 근본주의자로 보이지만 개혁파는 근본주의보다 더 포괄적인 신학체계와 역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메이첸이나 벤틸도 자신이 근본주의자는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김치선은 개신교전래 70주년을 맞이하여 1955년에 쓴 「신학과 신조」라는 글에서“신학은 신조를 무시 할 수 없고 신조는 신학을 갖지 아니할 수 없다. 이 둘이 완전히 서 있을 때 기독교의 생명이 있고 또한 신학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치선은 당시의 신학적 혼란의 상태를 염두에 두면서 무엇보다도 이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신학과 신조의 바른 관계 모색 속에 신학이 바로 서야 하며, 또한 이 신학이 바로 서려면 반드시 바른 신조를 토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김의환 박사는 “칼빈주의자는 근본주의를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근본주의자는 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증경 총회장 김재규 목사는〈김치선 목사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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