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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붙으심(욥6:1-7)
하나님의 붙으심(욥6:1-7)
  • 강영철 기자
  • 승인 2019.07.05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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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목사
창일교회
김한수목사
김한수목사

 

들어가면서
욥기서는 족장시대 기록이며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주제를 지혜문학형식의 성문서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창조세계를 보여주면서 너는  창조물과 다르고 너는 내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 자녀를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어려움과 고난과 재난(먹을거리 걱정, 사회적 지위 확보하는 것)과정은 종교적인 하나님을 성경적인 하나님으로 인도하는 과정 속에 필연적입니다. 하나님의 지금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4장-5장,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주장입니다. 세 가지 단락 4:6절~11절, 4:12절~5:7절, 5:8절~27절 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 단락은 하나님통치 아래의 도덕적 견고성을 현실 경험으로 확인입니다. 두 번째 단락은 도덕적 견고성은 경험뿐만 아니라, 계시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락은 욥이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어려움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은혜를 구하는 자로 돌아와라, 하나님이 네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벌을 주겠느냐? 네가 지금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만이 네가 살길 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1. 4-37장까지 욥의 친구들의 지적은 틀린 것입니다.  
4-37장, 세 친구가 돌아가면서 자신들의 사상이나 철학, 믿음을 가지고 욥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허용하시고 욥기 결론은 욥에게 기도를 하라고 하며 욥은 눈으로 하나님을 본다고 하여 마칩니다.
성경은 틀린 것을 기록합니다. 역방향을 기록합니다. 사무엘하서의 결론부분은 ‘다윗의 승전가, 기도, 다윗의 용사를 기록한 후 사탄이 인구조사를 허용하여 7만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을 보게 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듣고 재앙을 그치는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주인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고 만족의 에덴동산에 두사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도록 창조 되었다' 고 창세기 1-2장은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 방법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 가지셨던 그 목적을 포기하지 않고 오늘 욥기에서 자기의 사상을 가지고 지적하는 세 친구를 등장시켜 교훈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역사적인 사건 앞에서 침 삼킬 동안도 우리를 과녁삼아 일을 하신다는 것을 확인 시켜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그 형상으로 닮게 하시기 때문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 은혜의지 가운데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허용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2. 4-5장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은 허용 작정의 목적을 욥기를 가지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욥 자신은 3절, ‘경솔하였구나,’라는 것은 자책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힘들어서 비명이 무지불식간에 튀어 나왔다는 것이며 4-7절, 맛이 갔다는 표현으로 자신의 현 상황을 설명합니다.
8-10절, 욥의 고난은 하나님 앞에 잘못하여 당하는 고난이 아니며 친구의 주장은 인과응보의 틀에서 하나의 형별이다. 반면에 욥은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 내가 잘못해서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이 너무 심해서 죽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욥기의 핵심입니다. 즉, 도덕질서의 견고함이라는 것은 신앙의 있어서 제1의 틀입니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도덕질서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욥기는 교훈합니다.
11절, 엘리바스는 (욥4,3;5:2,17),‘참아야 한다.’ 고 욥에게 요구합니다. 엘리바스는 도덕질서체계 속에서 욥을 교훈하고 책망도 하고 그렇게 위로를 하는데 욥은 끊임없이 문제가 아니라고 답하는 부분입니다. 친구는 욥의 회개치 않고 죽어버리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냐?’주장하고 욥은 나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해를 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라 참을 수가 없어서 그렇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13절, 나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지만 너희의 주장과 내가 예전에 했던 신앙의 도덕질서 체계 속에서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으로 답이 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14-23절, 욥은‘물 찾다가 해매서 못 찾으면 뭐 그냥 죽는 것처럼’너희는 꼭 그 꼴이라고 친구들을 나무라하는 장면입니다. 마치 예수 믿으면서 예수 믿었고 저들은 안 믿었습니다. 불쌍합니다. 가서 욕할 필요 없고 정죄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믿은 것을 적극적으로 확인하고 자랑할게 없으니까 부정적으로 확인하기를 시작합니다.
예수 안 믿는 자들을 욕하기 시작하고 신앙생활을 잘 못하는 사람을 꾸짖어서 자기를 확인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신앙의 동력, 내 안에 자랑이 무엇인가 확인하고 알아야 됩니다.
24-30절, 욥은 비명 지르는데 와서 왜 그렇게 하느냐 나 좀 가만히 나두라는 것입니다. 내가 비명을 지르고 내가 절규를 하는데 왜 와서 어법이 맞다 틀리다. 문법이 맞다, 틀리다. 맞춤법이 맞다, 틀리다.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욥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며 친구들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적하는 것처럼 거기서 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덕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이 형별 받는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통이 왜 왔고 무엇인지 나도 사실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너희 보다는 내가 더 많이 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욥은 비명 가운데 가만히 나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명을 지르고 내가 절규를 하는데 어법이 맞다 틀리다. 문법이 맞다, 틀리다. 맞춤법이 맞다, 틀리다.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을 유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안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자녀 만드는 과정입니다. 정금같이 단련하는 현실입니다. 결국은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볼 것입니다. 
        

김한수목사 창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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