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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참전의 동기
6.25참전의 동기
  • 강영철 기자
  • 승인 2019.07.01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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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진 장로
생명샘교회
6.25전쟁
6.25전쟁

 

한국전쟁의 배경

1943년 12월의 카이로 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였고, 이는 다시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재확인되었다.

다만 독립은 ‘적당한 시기에’ 이룩한다는 조건부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5년 8월15일에 일본은 항복하였고, 그 통치지역이

었던 한반도는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도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미.소 양

군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분할된 상태로 미.영.소 3국 외상은 그 해 12월에 모스크바에서 회동하고,

한반도에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 국민은 맹렬히 반대운동을 저개하였으나 좌파세력이 소

련의 지령을 받고, 찬탁으로 돌아섬으로 정치적인 혼란이 일어났다.

반공사상으로 뭉쳐진 대한청년단과 서북청년다과 그리고 모든 시민들이

합세하여

서울시청앞 (덕수궁일대) 그리고 남대문을 향하여 신탁통치 반대을 웨치며

행진하며 적극적으로 우리의 통일의 소망을 알리며 저항 했다

한국문제가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직면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서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아무

런 해결책도 강구하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1947년 9월에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뿌리치고 한국 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

에 제기하였다. 이로써 38도선을 경계로 한 남북한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속에

서 이대오르기의 갈등마져 겪으면서 국제 무대에 노출되었다.

1947년 11월에 열린 유엔총회에서는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위

원단의 감시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사령관은 1948년초에 활동을 개시한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였다.

이에 유엔소총회의에서는 선거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의 총선거를 결의하여 그해 5월에는 선거를 행해졌고, (이때 이 선거를 반대한 남로당 지시에 의한 운동이 제주폭동사건으로 번져짐) 남한만이 선거가 행해짐으로 8월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게 된 것이다.

그 해 12월의 제3차 유엔총회에서는 한국을 총선거를 실시한 합법적 정부로 승인 하기에 이르렸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여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실시하여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함에 따라 소련을 비릇한 공산국가 여러 나라가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렸다.

이로써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권을 수립하여 분단을 공식화 하였다. 정부 수립을 마친 북한은 곧이어 미.소 양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이에 부응하여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소련은 그 해 10월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남한에서는 공산세력의 준동에 대응하여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한바였고, 이에 따라 미군의 주둔은 잠시 연기되긴 하였으나 1949년 6월에 미국은 약 500명에 달하는 군사고문단 (KMAG) 만을 남기고 남한에서 철수을 완료하였다. 저는 대구 폭동을 진압하고 육군본부로 원대 복귀한 후 곧바로 경기도 시흥에 소재히고 있던 육군보병학교 제3기 갑종간부후보생으로 1950년4월5일 입교하여 사관후보생으로 훈련중에 있었다.

남북한의 군병력과 국제적인 배경

미국과 소련이 그어 놓은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이 였던 38도선은 이제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국경 아닌 국경선이 되어벼렸다.

그러한 분단 과정에서 우선 북한은 소련에 의한 계획적인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여 소련제 T-34 중형 탱크로 무장한 제106기갑 대대를 편성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1949년 3월에는 소련과 북한은 조소군사비밀협정이 체결되고, 또 그 달 18일에는 중공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중공군에 편입되어 있던

조선족군인 2만5처명을 북한에 인도하였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된 김일성은 이어 국내외정세에 고무되어 무력통일을 구상하게 되었다.

국외의 요인으로는

a. 1949년 10월 중국대륙이 공산화도였고.

b. 1949년 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 하였으며.

c. 1950년 1월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싴킨다는 애치슨

(Acheson. D. G) 미 국무장관의 성명이 있었다.

d. 그리고 1949년 말경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 남한의 무력침공 계획에

대한 스탈린 (Stalin. I.V ) 의 승인을 받아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이 되었지만 남한 지역에서의 남로당 활동을 저지하고

사회질서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가고 그 남로당의 인민혁명에 가능성이 회박

해지자 김일성이는 ‘민족해방을 위한 투사로서의 경쟁’에서 박헌영 (朴憲永)

을 압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남한은 아직도 정치, 경제적으로 혼란상태에 있다는 것과 국군의 병력장비가 열세였기 때문에 이것을 알고 김일성이는 이러한 배경에서 1950년 4월초 조선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무력통일을 확정시키는 한편, 이러한 침략계획을 은폐하기 위하여 북한 공산당은

남북통일 최고입법회의 서울에서 개최와 국회에 의한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는 등 평화공세를 펼쳤다.

남로당에서 간첩해위를 하던 거물 성시백, 이주하, 김삼룡을 검거하여 형무소에 수감중이 였던 그 때

김일성이는 조건 없이 고당 조만식 선생과 맞교환하여 그들을 북한으로 송환해 줄것을 제의 하였으나 무산되고

결국 김일성이는 1950년 6월24일 새벽 38도선 전역에서 기갑대대 탱크를 앞에우고 진격하기 시작했고 하늘에는 전투기로 남한 군대를 기총소사로 그리고 삽시간에 개성을 (본래 남한땅이 였음) 비릇한 전역으로 진주하며 계속적으로 남지하기 시작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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