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07-22 17:22 (월)
“6.25가 일어난 동기와 우리민족에 미친 영향”
“6.25가 일어난 동기와 우리민족에 미친 영향”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19.06.21 11: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호진 장로
김호진 장로

 

 

세계제 2차 전쟁 (大東亞戰爭) 이 한창인 시절 중학교2학년이 였고,

평양의 각 중학교에서는 여름방학동안 근로보국대로 동원되여 평양

인근 (중화군 역포 ) 에 일본군 비행장을 건설하는데 평양시내 모든

중학교 학생들이 동원되었었다.

그때는 전쟁중이라 가끔 평양 하늘에 미B29폭격기가 나타나면 공습

경보 싸이렌이 울려 퍼지면 우리들은 수업을 중지하고, 방공호로 피

신 하였다가 폭격기가 사라지면 공습경보 해제와 더불어 교실로 모

였다가 조기 귀가 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가 37년만에 해방이 되

었다 그 때가 중하교 3학년이 였고, 해방의 진실한 의미와 그 뜻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었다.

그럼으로 김일성이에 대하여 어떤 인물인지 독립운동을 위하여 어떤

활약을 했는지도 생소 했으며 한국교사로부터 역사공부를 함으로 고당

조만식 선생에 대한것도 비로서 알게 되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어 독립만세를

부르며 온 시민이 기뻐했었다.

그해 9월19일 김일성 등 항일유격대원들이 원산항을 통해 귀국 했다.

그리고 사흘 뒤인 22일에는 그들이 평양에 입성한다고 하여 평양 전

시민과 각 중학교 학생들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그들 일행을

환영 하였다.

 

우리들은 진심으로 독립운동을 목슴걸고 하신 그들의 노고에 대하여 진정

으로 환영하였다.

그리고 그해 1945년10월14일에는 평양에서 7만여 명의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대대적으로 조선해방축하집회를 여렸다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이가 평양시민들에게 소개 되면서 비로서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김일성은 해방 후의 한국에서 정치 기반이 전혀 없었으나 소련 군정의

도움을 받아 1946년 2월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조만식

서생을 초대 인민위원장으로 모시고저 하였으나 사회주의 노선에 반대

함으로 거절을 하였다.

그리고 김일성 자신이 위원장이 되어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 소련의 의한 북조선 수탈과 김일성의 협조>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 소련군은 북조선에 진주하였는데 소련의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이였던 김일성은 소련군의 만행에 대해 방관하는 입장을 고수

할 수 밖에 없었다. (소련군정의 꼭두각시) 였었기에 실제로 소련군은 북한

여성에 대한 폭력, 강간, 그리고 약탈과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시민이 많았었다.

이러한 광경을 본 시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고, 자발적을 양호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소련군에 대항하기 시작했으며 많은 학생들도 동참하게 되었다

 

한편 김일성기가 조직한 인민위원회에서는 토지계획을 세우고 지주들의 토지를

무자비하게 몰수하며 숙청하기 시작하여 집까지 점령하여 몰수 하였다.

그 토지를 소작인이나 노동자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여 줌으로 처음에는 대대

저으로 환영하며 좋아 했었다.

어글하게 토지와 집을 빼앗긴 탓으로 학생들은 데모하며 저항운동을 전개하며

공산당 타도를 웨치기 시작하고 소련군 철수를 스러건으로 내세웠었다.

 

김일성이는 공산당 산하 적위대를 동원하여 보안검색 내지 체포명령을 내림

으로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피신하게 되었고 부유층이상인 가족들도 이남으로

많이 넘어오게 되었다.

그후 소련군은 일본과 치른 전쟁의 대한 배상에 일환으로 북조선의 수력발전소의 시설,

그리고 각 공장의 부속품 뿐만 아니라 쌀을 가져가기위해 농작물의

1/4을 공출하는등 심각한 경제 수탈을 감행했으며 이에대한 결과로 처음에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받었던 농민들은 허탈감에 빠져 오히려 원망의 소리가 나오게 되었다.

 

<월남후 남한에서의 활동>

 

저는 중학교을 졸업하지 못하고 월남했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을

못하고 서북청년단에 입단하여 정치활동의 일환으로 박헌영이가 주도하는

남로당진멸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민주당을 이끌고 있던 여운홍씨이 집무실도 점령하고 서울

시내 각대학교의 남로당 뿌랏치 제거에 힘써오다가 남로당 간부들에게 체포되

어 죽을곱이도 있었고 더 이상 맨주먹으로는 저들과 싸워 이길수가 없다는

느낌을 받으므로 군에 입대하여 총칼로 싸워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서북청년

단원들이 많이 입대한 호림부대에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 입대하였다.

마침 대구의 폭동사태가 일어나 미군과 경찰의 힘으로도 역부족 경상북도

일원( 경산, 성주, 영천 포항, 달성 그리고 대구시) 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여기에 호림부대가 동원되어 저도 대구 대봉동에 주둔하고 있던 백골부대에

본부를두고 대대적인 소탕작전에 돌입하였다.

이때 대구시내의 육군제 3사단이 있었으나 남로당계열에 육군장교도 감담하고

있었기에 우리 호림부대 특수임무 수행하는데는 별 도움을 받지 못했다.

대구시내 치안을 맏고 소탕작전에 돌입하여 폭도들은 팔공산으로 피신하고

주간에는 치안이 잘 이루어졌으나 밤에는 폭도들이 양민을 학살하고 만행을 저

질러 통행금지로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고 우리 부대 일부는 달성군까지

치안을 담당하며 계릴라 소탕작전에 돌입하였다

 

<정부수립 이전인 남한이 정세에 대하여>

 

정부수립 이전인 1946년 9월 서울에서의 철도파업, 그리고 10월에는 대구폭동

제주 4.3사태와 그후의 한라산 일대에서의 게릴라전 등을 비릇하여 ,1948년

10월에는 김지회중위, 서상사라는 군인이 남로당 지령의 의하여 여순반란과

지리산 태백산 및 오대산 일대에서의 빨치산 활동등으로 남한의 치안은 극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이와 덤불어 1948년 11월17일 오대산 부근으로의 북한군 침투로부터 시작하여

북한의 남침 저까지 38도선 일대에서도 10여차례의 북한공산군에 의한 침투가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장세력에 의한 활동에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북한의

김일성은 최종적인 수단으로 전면전인 남침계획을 세우고 남북통일의 꿈을 꾸

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남침에 대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