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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대왕과 갈처사의 이야기
숙종대왕과 갈처사의 이야기
  • 강영철 기자
  • 승인 2019.04.22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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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진 장로
생명샘교회 원로
숙종대왕
숙종대왕

 

조선19대 임금 숙종대왕 (1661년~1720년)은 성은 이 (李) 휘는 순 본관은 전주 (全州) 자는 명보이지요 1674년 음력 8월에 13살의 어린 나이로 조선의 19대 임금으로 즉위하였으나 총명하고 속 깊은 그는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직접 나라를 통치하였지요. 어려서부터 영특한 지묘와 카리스마적인 성격으로 남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을 잠재웠으며 항상 왕으로서의 권위를 잃지 않고 남다른 애정으로 그 유명한 장옥정 (張玉貞)과 희대(稀代)의 사랑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백성들의 삶을 직접 살피고저 무관과 내관 한 사람씩만 데리고 민정시찰 (民政視察)을 자주 하셨다.
어느날 숙종임금이 멀리 수원성(水原城)가까이 말을 타고 민정시찰을 나갔는데 흐른는 냇가(水原城附近)을 지날 무렵 허름한 시골 총각(總角)이 혼자서 관 (棺) 하나를 옆에두고 슬피 울면서 냇가의 땅을 파고 있었어요! 사람이 살다보면 상(喪)을 당(當) 하여 묘(墓)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묘‘라는 것은 산에 쓰는것이지 파는 쪽쪽 물이 솟아 나는 냇가에 ‘묘’자리로 파고 있는 더벅머리 총각이 괴히하게
느껴졌습니다.
숙종대왕은 그냥 지니치려다가 문득 ‘아무리 가난하고 땅이 없어도유분수(有分數)이지 어찌 송장을 물속에 넣으려고 하는지 ~....!! 희안도 하여 그래도 무슨 사연(事 緣)이나 곡절(曲折)이 있겠지 하여 다가가서 “여보게 총각! 여기 있는 이 관(棺)은 누구것인가“? 제 어머니 시신(屍身)이 들어있는 ‘관‘입니다“ ‘그런데 왜 물이 나는 냇가를 파고 있는 고?“ ‘이곳에다 묘(墓)를 쓰라고 하기에 여기에다 ....“짐작(斟酌)은 했지만 어치구니가 없는 생각이 숙종대황에 마음에 “여보게 총각 이렇게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어찌 어머니 ‘묘’를 이곳에 쓰려고 하는가“? ‘저도 영문을 모르겠어요’~...
오늘 아침에 어머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 처사 (葛 處士)라는 노인(老人)이 찾아와 절더러 불쌍타 하면서 이리로 데리고 와서는 바로 이 자리에 꼭 어머니 ‘묘’를 쓰라고 일러 주셨어요  그 분은 원낙 유명한 지관(地管)인지라 아무소리 못하고 알았다고 했어요 총각은 옷소매로 연신 눈물을 흠치며 자신의 곤혹스런 처지를 처음 보는 큰 갓을 쓴 양반(兩班)나리에게 하소연 하듯 아뢰었어요 이야기를 듣고 난 숙종대왕이 괘씸하기 짝이 없어서 그 ‘갈 처사‘라는 지관이 사는 곳을 아느냐? 하고 물으니 ‘저기 저 언덕위 오막살이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숙종임금은 궁리 끝에 내관이 지니고 있던 지필묵(紙筆墨)을 꺼내어 몇자 적었어지요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서찰을 수원부로 가져가게 수문장들이 성문을 가로 막거든 이 서찰을 보여주게."
총각은 또 한 번 황당했다. 아침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지. 유명한 지관이 냇가에 묘를 쓰라고 했지. 이번에는 웬 선비가 갑자기 나타나 수원부에 서찰을 전하라 하지. 도무지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추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총각은 급한 발걸음으로 수원부로 갔다. 서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명! 수원부사는 이 사람에게 당장 쌀 삼백 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서 묘를 쓸 수 있도록 급히 조치하라. 수원부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허름한 시골 총각에게 유명한 지관이  동행하질 않나, 창고의 쌀이 쏟아져 바리바리 실리지를 않나. "아! 상감마마, 그 분이 상감마마였다니!" 총각은 하늘이 노래졌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냇가에서 자기 어머니 시신을 지키고 서 있을 임금을 생각하니, 황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한편 숙종대왕은 총각이 수원부로 떠난 뒤 괘씸한 갈 처사라는 자를 단단히 혼을 내 주려고 총각이 가르쳐 준 대로 가파른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단단히 벼르고 올라간 산마루에 있는 찌그러져가는 갈 처사(葛 處士)의 단칸 초막은 그야말로 볼품이 없었다.
"이리 오너라" "..............." "이리 오너라"
".............." 한참 뒤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게 뉘시오?" 방문을 열며 시큰둥하게 손님을 맞는 주인은 영락없는 꼬질꼬질한 촌 노인네 행색이다. 콧구멍만한 초라한 방이라 들어갈 자리도 없다. 숙종은 그대로 문밖에서 묻는다.
"나는 한양 사는 선비인데 그대가 갈 처사 맞소?" "그렇소만 무슨 연유로 예까지 나를 찾소?" "오늘 아침 저 아래 상을 당한 총각더러 냇가에 묘를 쓰라했소?"  "그렇소" "듣자니 당신이 자리를 좀 본다는데 물이 펑펑 솟아나는 냇가에 묘를 쓰라니 당키나 한 일이요? 골탕을 먹이는 것도 유분수지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
숙종임금의 참았던 감정이 어느새 격해져 목소리가 커졌다. ‘갈’씨 또한 촌 노이지만 낯선 손님이 찾아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선비란 양반이 개 코도 모르면서 참견이야.! 당신이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명당 터인 줄 알기나 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숙종임금은 기가 막혔다. (속으로 이놈이 감히 어느 아전이라고 대왕 앞에서, 어디 잠시 두고 보자 하고 감정을 억 누르며) "거기가 어떻게 명당이란 말이요?"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이 양반아 거기는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쌀 3백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들어가는 땅이야.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팔복을 받는 자리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때?
개 코도 모르면 잠자코 나 있으시오"
숙종임금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갈 처사’ 말대로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총각은 쌀 3백가마를 받았으며 명당으로 옮겨 장사를 지낼 상황이 아닌가! 숙종은 ‘갈 처사’의 대갈일성에 얼마나 놀랬던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공손해 졌다. "영감님이 그렇게 잘 알면 저 아래 고래 등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지 않고 왜 이런 산마루 오두막에서 산단 말이오?" " 이 양반이 아무 것도 모르면 가만이나 있을 것이지 귀찮게 떠들기만 하네" "아니, 무슨 말씀인지" 숙종은 이제 주눅이 들어 있었다. 저 아래 것들은 남을 속이고 도둑질이나 해 가지고 고래 등 같은 기와집 가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그래도 여기는 바로 임금님이 찾아올 자리여. 지금은 비록 초라하지만
나랏님이 찾아올 명당이란 말일세" 숙종은 그만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이런 신통한 사람을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었다. 꿈속을 해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왕이 언제 찾아옵니까?" "거, 꽤나 귀찮게 물어 오시네. 잠시 기다려 보오. 내가 재작년에 이 집을 지을 때에 날 받아놓은 것이 있는데, 가만.... 어디에 있더라" 하고 방 귀퉁이에 있는 보자기를 풀어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먼지를 털면서 들여다보더니......
그만 대경실색을 한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종이에 적힌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시간이었다. 임금을 알아 본 것이다. "여보게.... 갈 처사, 괜찮소이다. 대신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묻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소?" "대왕님의 덕이 높으신데 제가 신하로서 자리 잡아 드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어느 분의 하명이신데 거역하겠사옵니까?"
그리하여 갈 처사는 지금의 고양시에 위치한 서오능(西五陵)중에 ‘명능(明陵)이며 그’명능‘은 ’서오능‘중에 가장 정평이 나 있는 능이며 갈처사가 잡아준 숙종임금의 왕릉이 되었다 그 당시 숙종대왕은 갈 처사에게 3천냥을 하사하였으나, 노자로 30냥만 받아들고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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