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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화재와 성경 해석
남대문 화재와 성경 해석
  • 교회협동신문
  • 승인 2019.03.07 12: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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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규 목사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김영규교수
김영규교수

“책임의식 없이 성경 대하는 것은 불경한 일”

조선왕조 태조 7년 1398년에 준공되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25 한국전쟁등 숱한 국가재난에도 건재하였다가

그렇게 높은 문화의 시대인 21세기의 문턱에 와서 불에 타버린 숭례문 화재에 대한 책임공방이 뜨겁다.

그 사건은 미국의 9.11 테러사건과 그 성격을 아주 달리 해석될 수 있겠지만,

그 화재사건을 통해서 그 화재사건 뒤에 숨겨진 우리 현대사회의 모순

과 그 문제점이 얼마나 큰지를 드러내고 있다.

국보 1호의 위치는 유지되더라도 실질적 문화적 가치로서 그 기능은 이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

 

화재로 타버린 남대문

문제는 우리 사회 안에는 정부나 사회, 혹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일에 대해서

혹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테러도 서슴없는 이념 폭력주의자들, 경제 폭력주의자들, 지식 폭력주의자들,

더 잔인한 종교 폭력주의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중고등 학생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상스러운 욕들은 귀가 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이미 언어폭력 자체들인데도 사회가 그런 폭력들을 근원적으로 제어할 체계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

지금의 사건은 정치적 고집불통의 폭력들로부터 안면몰수의 지식인 폭력, 약자나

아동 학대에 대한 비양심적 폭력, 이웃의 물적 재산이나 지적 자산에 대한 무의식적인 사기행각들, 사회적으로

용인된 폭력 등 수 많은 폭력들이 난무한 사회에서 언제든지 생길 수 있는 사건이다.

거짓 자체가 사회인들의 몸에 익숙해져 있다. 또한 방화한 노인의 말 가운데, “문화재는 복원하면 됩니다”는

말만큼 현 사회의 책임수준을 상징하는 말도 없다.

현대사회에서의 높은 책임 수준과 정직한 생활이란

고도의 지식과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거의 초인에 가깝지 않으면, 보통 사람들은 정직한 사람들이 되기가 극히 어렵다.

우리 주변에서 자원외교, 석유자원의 무기화, 자원의 국유화의 우려에 대한 목소리를 쉽게 듣는다.

그러나 한 나라 에너지 대기업의 고위 책임자의 입으로부터 “대체 에너지 개발은 나라별 특수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는

발목을 잡는 말은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고 국민경제의 먼 미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기업정신의 대표적 입장이다.

석유자원 확보에 대한 경쟁은 에너지 자원의 확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미래 첨단산업들을 위한 전략적 자원들의 비축으로 이해함이 더 타당할 것이다.

세계경쟁에 있어서 지금 당장 친환경 에너지 혁명이 총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니 된다.

기업의 총체적 도덕적 해이라는 것은 풍부한 유동성으로 자산가격 상승을 부추기고 남의 돈을

빌어 투자 효과를 극대화하여 거기에서 남은 이익들을 기업의 책임자들이

어떤 형태로든 비자금으로 빼돌려 개인들이 착복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을 미리

예측하지 못하여 미래 자신들의 기업과 국민경제에 해를 끼치는 결정을 하였을 때도 적용되는 말일 것이다.

지금 세계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인한 세계 금융시장의 부실과 손실에 대한 책임으로

은행들의 첨단 위험관리시스템에서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그것에 대응한 금융감독 체계의 효율성

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이미 그 시스템 자체가 각 자의 책임을 회피하는 기본 시스템이다.

모두가 그 시스템에서 개인의 자산을 늘리면 그 만이라는 입장이다. 거기에서 관련된 자들은

말단에서부터 최고 책임자들까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더구나 남은 모든 생과 자산을 통해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숭례문 화재의 근원적 원인들을 소급해 보아도 국가와 대기업들이 남의 땅을 가지고 합법적으로 장사한 것이 문제이다.

땅을 개발할 때, 국가와 대기업 그리고 땅의 원 주인들이 함께 이윤을

나누었으면, 그런 억울한 일이 없었을 것이다.

땅의 원주인이 억울해 하는 것은 국가와 대기업이 개발하여 지금 자신의 땅이 그렇게 고가의 가치가 되었는데

그것에 따른 이윤을 합리적으로 공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가는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국민경제와 국가적 미래 발전에 이바지하는

사업들을 정하여 거시경제를 위한 장기투자에 세금을 쓰고 특별한 개발사업들은 가능한 규제들을 풀어 일반 기업

인들이 자유롭게 이윤을추구할 수 있도록 돕되 개발이익금은 기업인과 거기에 관련된 국민들이

하나의 이익단체로서 같은 비율로 나누어 갖도록 운용되어야 그런 억울한 일이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분명히 불평등이 있기 때문에 사회에 병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억울한 일은 너무 많다. 손을 빌어서라도 모든 것에 대해서 지원을 해야 할

그런 교육사업에 정부나 자치단체가 도시개발을 위해서 많은 후원자들의 헌금으로 산 땅인 학교부지까지 개발

에 포함시켜 서류 상 법적 책임도 없이 구두로만 다른 부지를 대체해준다고 약속해 놓고 마음대로 개발해 버리는 일도 있다고 한다.

한 문화재 화재사건으로 불거진 현대사회의 모순과 문제점에 비해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들에 대한 훼손들은 더 심각하다.

창세기 기록은 주전 2400년대 셈족 고유한 에라 토판들에서만 비로소 유일하게 증명이 되는 ‘서서 가로되’ ‘가서 가로되’, ‘올라가 가로되’ 등의

구술 방식을 보존한 인류의 유일한 기록들이다.

그리고 현존 남아 있는 애굽 문헌들이나 문서들 중에서 제 11-12 왕조(대략 주전 2134-1785 년) 외에는 증명할 길이 없는

‘누가 누구에게 말하여 가로되(부정사)’란 표현기술방식이 현존하여 남아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신약성경의 바울 서신들의 헬라어 1세기 파피루스 사본에

티베리우스, 클라디우스 로마황제 시대 전후의 철자법이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책도 성경책이다.

 

4천년 이상 보존된 성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창조자 하나님과 구주 하나님에 대한 그 기록된 모든 계시들에 대해서 두려워하지도 않고 들으려고도 아니한다.

성경을 역사적 문화재와 같이 취급하여 독자가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여 읽고 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설교하고 있다.

기록된 계시들에 대해서 호기심을 멈추지 않고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지나가거나 침묵하기를

원하고 있다.

더구나 그 언어들 뒤에 자연의 신비를 넘어 하나님 자신과 그 속성들에 대한 실재성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너무나 큰 죄가 되는 행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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